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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5월 10일 Mo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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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마, 기념일!] 유권자의 날,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적 선거

[아시아타임즈=윤진석 기자] 이번 5월에는 많은 기념일이 존재하는데요.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 부부의날, 성년의날 등 외에도 근로자의날도 5월이었고,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 부처님오신날도 이번달입니다. 또한 이날 5월 10일은 유권자의 날인데요. 5월 10일은 유권자의 날은 지난 2012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제정한 법정기념일로, 1948년 5월 10일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적 선거인 제헌국회의원 총선거인 5·10총선거가 실시된 날입니다. 당시 제헌국회의원들은 헌법제정 등을 이유로 구성됐으며 때문에 2년의 임기로 이뤄졌죠. 또한 이 선거가 치러지는 법적 근거가 대한민국 법이 아니라, 미군정 하의 임시 특별법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당시 국제연합의 결의로 남북총선거가 예정됐으나, 소련의 거부로 북한지역에서 선거를 열 수 없어, 결국 남한지역에서만 총선거가 실시되는데요. 김구를 중심으로 통일정부를 구성하자는 남북협상파와 좌파세력인 남로당은 불참했고, 중도진영인 근민당과 민독당 등은 선거를 반대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투표율은 95.5%를 기록합니다. 당시 투표권은 지금처럼 성인 남녀에게 모두 주는 것이 아니라 투표인으로 등록해야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는데요. 전체선거 등록인 784만871명 중 748만7649명이 참여했죠. 이처럼 높은 투표율을 기록한 이유는 바로, 대한민국 국민들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선출자를 뽑는 최초의 선거였기 때문입니다. 이전 일제시대 때는 조선인의 참정권이 제한됐었고, 이후의 선거도 간접선거였거나 미군정이 개입하는 등 정상적인 선거가 이뤄지지 않았죠. 이후 제헌국회는 7월 17일 헌법을 제정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합니다.

[신간] 회계의 신이 알려주는 주식투자 생존법-테슬라, 언제까지 오를까?

[아시아타임즈=김지호 기자] 1000만 주식 투자자 시대에 주린이 3명 중 2명은 돈을 잃었고, 큰손들만 벌었다. 코로나 위기에 승리를 쟁취한 이들은 돈을 어떻게 불렸을까? 대기업, 공기업 강사 섭외 1순위인 구성섭 회계사는 이 책을 통해 개인의 인맥과 정보, 투자 능력의 한계를 돌파하고 부를 거머쥐는 비밀을 안내한다. 부의 감각 말이다. 그 역시 과거에 주식으로 2억원을 날린 적 있다. 일류 회계법인을 퇴사하고 자산가들의 재무 컨설팅을 하면서 그들의 공통점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돈을 불리는 법칙을 깨우치고 부를 이뤘다. 그 노하우를 강의한 지 7년, 전국의 크고 작은 기업들이 대기표를 끊고 수개월을 기다릴 만큼 인기가 폭발적이다. 그 부자 특강의 정수를 담아 출간한 것이 이 책이다. 주식 투자를 할 때 왜 회계를 알아야 할까? 저자는 '현금이란 훌륭한 자산에 투자하기 위한 5분 대기조'라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 회계, 재무지식으로 무장한 사람들은 위기가 왔을 때 현금을 움켜쥐지 않고, 오히려 주식을 싸게 사들여서 자산을 불린다. 그러려면 스스로 대박 종목을 발굴했다가 정확한 타이밍에 사고팔 수 있어야 한다. 가치가 오를 대로 오른 테슬라를 사도 될지, 5년 뒤 100배의 수익을 낼 종목은 무엇인지, 지금이라도 가상화폐에 뛰어들어야 하는지 당신의 인생을 뒤바꿀 수많은 투자 의사결정을 할 때 회계가 멘토의 역할을 해준다. 책은 시장의 원리를 쉽게 설명하고, 그 원리를 바탕으로 짠 전략에 따라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도록 종합적으로 안내하는 주식 투자 입문서이다. 예를 들어, 테슬라와 같은 성장주가 언제까지 상승할지 현금흐름과 할인율을 통해 예측하는 식이다. 성장주는 현재 마이너스 현금흐름을 보이지만 할인율이 떨어지면 고스란히 기업 가치에 반영된다. 할인율을 결정하는 가장 주요한 요소는 금리다. 결국 테슬라와 같은 성장주 주가 상승세를 금리 상승 시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저자는 중국이 미국의 금리인상에 대비해 부채 축소 정책을 펴고 있지만 미국은 이를 이용해 오히려 자산가치를 지속적으로 올릴 것으로 예상했다. 다만, 부채 해결의 목적이 달성되고 난 다음에는 성장주 투자를 조심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주식 투자란 인내를 가지고 국민연금과 같이 장기전으로 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평생 부자들의 조력자로 살면서 깨달은 것은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큰돈을 벌 기회는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 1997년 IMF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 코로나19에 수많은 자산가가 탄생했듯이 당신도 인생에 한두 번만 이런 기회를 잡아낸다면 대대손손 부자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잊지마, 기념일!] 어버이날, 시작은 어머니날?

[아시아타임즈=윤진석 기자] 낳으시고 길러주신 어버이의 은혜에 감사하고, 어르신을 공경하는 마음을 키우기 위해 제정한 기념일인 어버이날은 1956년 한국전쟁 이후 양육과 생업 등으로 힘든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한 '어머니날'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973년 '아버지는 차별하냐'는 의견에 따라 어버이날로 바뀌죠. 어버이날은 본래 사순절 첫날부터 넷째주 일요일 어버이의 영혼에 감사하기 위해 교회를 찾는 영국과 그리스의 풍습과 미국의 안나 자비스라는 여성이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해 교회에서 흰 카네이션을 나누어 준 일에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이후 1914년 미국 28대 대통령인 토머스 우드로 윌슨은 5월 둘째주 일요일은 어머니날로 정했죠. 참고로 아버지날은 6월 셋째주 일요일입니다. 1994년 빌 클린턴 대통령은 7월 넷째주 일요일이 어버이날로 지정합니다. 이같이 미국은 어머니날, 아버지날, 어버이날이 모두 있는데요. 중국과 일본은 5월 둘째주 일요일을 어버이날로, 셋째주 일요일을 아버지날로 지정했죠. 중국과 일본 모두 어머니에게 빨간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선물을 드리면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다고 합니다. 베트남은 7월7일이 어버이날이고, 필리핀은 미국과 같이 5월 둘째주 일요일을 어머니날, 6월 세째주 일요일을 아버지날로 기념하고 있죠. 그리스는 1월 8일이 어머니날로 평소 살림에 손을 대지 않는 문화인 그리스는 어머니날에는 여자들은 휴식을 취하고 남자들이 집안일을 도맡는 문화가 있다고 합니다. 멕시코는 매년 5월 10일이 어머니날이었지만 코로나19에 의해 지난해 7월 10일로 연기되기도 했습니다.

[역사속 오늘] 1차대전 미국의 참전계기⋯ 루시타니아호

[아시아타임즈=윤진석 기자] 1914년,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합니다. 이후 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해상전력이 부족했던 독일제국은 영국으로 접근하는 수송선을 격침시킨다는 작전을 실행합니다. 1915년 5월 7일 큐나드 라인이 운영하는 여객선 RMS루시타니아 호는 아일랜드 앞바다에서 독일 제국 해군의 유보트 U20의 어뢰에 맞아 침몰합니다. 앞서 독일은 각국의 일간지를 통해 "독일 제국은 영국과 전쟁 중이니 영국에 접근하는 선박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공격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루시타니아호는 이를 무시하고 영국으로 향했죠. 결국 루시타니아호 탑승자 1959명 중 761명만이 살아남았죠. 불과 3년 전인 1912년 4월 타이타닉 침몰사고가 있었기에 루시타니아호에 구명정 등의 구조물품은 충분히 있었지만, 어뢰로 인한 폭발과 배가 18분만에 침몰해버리면서 많은 이들이 구조되지 못했습니다. 루시타니아호는 어느 나라나 군대가 아닌 민간이 운영하는 배였습니다. 루시타니아호가 독일의 경고를 무시한 것도 민간선박이기 때문에 공격하지 않을 것이란 점 때문이었죠. 그러나 독일은 루시타니아호에는 무기가 실려있었기 때문에 공격이 정당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루시타니아호는 영국 해군의 보조함으로 등록돼 있었고, 이후 총탄 등의 군수물자를 싣고 있었다고 밝혀졌죠. 그러나 독일의 무차별적인 잠수함 작전에 미국은 격분합니다. 루시타니아호가 침몰하면서 미국인 128명이 숨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은 치머만 전보사건과 같이 미국의 1차 세계대전에 참전의 원인이 됩니다.

[역사속 오늘] 콜럼바인 고교 총기난사 사건

[아시아타임즈=윤진석 기자] 1999년 4월 20일 미국 콜로라도주 콜럼바인에 위치한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총격사건이 발생합니다. 콜럼바인 고교 총기난사 사건으로 학생 12명과 교사 1명 등 총 13명이 숨졌고, 21명이 부상을 당했죠. 범인은 당시 12학년(우리나라 고3)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레볼드였습니다. 또한 이들은 총 외에도 사제폭탄을 몇 개 준비했죠. 터진 폭탄은 이 중 1개뿐이었습니다. 미 언론 USA Today는 콜럼바인 사건에 대해 "웅장하게 계획됐고, 끔찍하게도 만약 그것이 실현됐다면, 총기난사뿐만이 아닌 폭탄테러였을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실제 범인들이 카페테리아에 설치한 폭탄이 터졌다면, 사상자는 크게 늘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날 해리스와 클레볼드는 학교에서 900여발의 실탄을 난사했고, 이후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해리스와 클레볼드가 본래 계획했던 것은 총기난사가 아닌 폭탄테러였습니다. 당시 카페테리아 내에는 488명의 학생이 있던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본래 범인들은 이 카페테리아 2개의 폭탄을 설치해 터트릴 계획이었으나 기폭장치가 작동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범인들은 이에 총을 들고 학교 안으로 들어가죠. 이후 학교를 돌아다니며 둘은 총을 난사합니다. 이후 출동한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던 중 극단적 선택을 합니다. 이 사건을 모티브로 많은 작품이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나이트위시, 포스터 더 피플, 마이클 그레이브스, 마릴린 맨슨 등의 노래가 이 사건과 관련돼 있죠. 또한 'Super Columbine Massacre RPG'는 콜럼바인 사건을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게임으로, 사건에 대해 알아보고, 왜, 어떻게 그들이 이런 짓을 하게 되었나를 알아 볼 수 있도록 하는 다큐멘터리적 성격의 게임입니다. 영화로도 제작됐는데요.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 감독상을 수상한 영화 엘리펀트와 칸영화제 55주년 특별기념상과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한 볼링 포 콜럼바인도 이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됐죠. 또한 범인 중 한명 딜런 클리볼드의 어머니, 수 클리볼드는 2016년 책 '나는 가해자의 어머니입니다'를 지필하기도 했습니다.

윤여정, 한국 배우 최초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아시아타임즈=김성은 기자] 영화 '미나리'에 출연한 윤여정이 한국 배우 중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 연기상을 수상했다. 윤여정은 26일 오전(한국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미나리의 순자 역으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윤여정과 함께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배우는 '보랏 서브시퀀트 무비필름'의 마리아 바칼로바, '힐빌리의 노래'의 글렌 클로스, '맹크'의 어맨다 사이프리드, '더 파더'의 올리비아 콜맨 등이다. 이번 아카데미 수상은 한국 배우 중 처음이자, 아시아 여성 배우 가운데 '사요나라'의 우메키 미요시 이후 64년 만이다. 브래드 피트의 호명에 무대에 오른 윤여정은 미나리 출연진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윤여정은 "정이삭 감독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 설수 없었다"며 "우리의 선장이자 나의 감독이었다"고 미나리를 연출한 정이삭 감독을 치켜세웠다. 이어 "다섯 명의 후보가 각자의 영화에서 다른 역할을 했다"며" 내가 운이 더 좋아 이 자리에 있는 것 같다. 내가 어떻게 글렌 클로스 같은 대배우와 경쟁하겠나"며 후보에 오른 다른 배우들에 대한 예의를 표했다. 특유의 위트있는 입담을 뽐내기도 했다. 윤여정은 미나리 제작사 A24를 설립한 브래드 피트에게 "드디어 브래드 피트를 만났다. 우리가 영화를 찍을 때 어디 있었냐?"는 농담을 건넸다. 이어 "유럽 분들은 제 이름을 여영이나 유정으로 부르는데, 나는 윤여정이다"며 "오늘만은 여러분 모두 용서해드리겠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김기영 감독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윤여정은 "나의 첫 번째 영화를 연출한 김기영 감독님에게 감사하다"며 "여전히 살아계신다면 수상을 기뻐해 주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나리는 1980년대 미국 남부 아칸소주 농장으로 이주한 한인 가정의 이야기로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가 바탕이 됐다. 여기서 윤여정은 딸 모니카(한예리) 부부를 돕기 위해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할머니 순자 역을 맡아 열연했다. 미나리는 여우조연상 외에도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음악상, 각본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나머지 5개 부문 수상은 불발됐다. 한편, 미나리는 지난해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과 관객상을 시작으로 미국영화연구소(AFI) 올해의 영화상,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크리틱스 초이스 외국어영화상 등 100여개의 상을 휩쓸었다.

[역사속 오늘] 사상 최악의 재난 체르노빌 원전 사고

[아시아타임즈=윤진석 기자] 1986년 4월 26일 우크라이나 키예프주에 있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폭발이 발생합니다. 당시 체르노빌 원전 4호 원자로에서는 아나톨리 다틀로프의 지휘 하에 실험이 진행 중이었고, 실험 중 원자로가 제어를 잃고 폭발합니다. 당시의 폭발은 4호 원자로 건물을 붕괴시키고, 파편을 인근 원자로와 발전소에 흩뿌렸습니다. 또한 폭발로 생긴 방사성 물질로 가득한 불꽃이 1㎞ 상공까지 휘날렸죠. 이같은 폭발로 최소 500경 베크렐, 최대 1200경 베크렐의 방사능 물질이 사방으로 누출됐습니다. 또한 폭발 후 다틀로프와 알렉산드르 아키모프 선임 연구원 등 당시 실험 연구원들은 발빠른 대처에 나섭니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했던 것은 폭발은 수소로 인한 것이고 원자로는 아직 살아있다고 오판한 것이죠. 결국 원자로에 문제가 생기기전에 화재를 진압하고 원자로 노심에 제어봉을 수동으로 삽입해 냉각수를 공급해는 쪽으로 대처가 정해집니다. 이로 인해 추후 피폭 피해자가 크게 늘게 됩니다. 당시 출동한 레오니트 텔랴트니코프 소방 준장과 블라디미르 프라비크, 빅토르 키제노크 등 소방대원들은 방사선에 노출되는 것조차 모른 채 화재를 진압하고, 화재로부터 원자로 3호기를 보호하는 것까지 성공합니다. 화재 진압도 쉽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화재가 일반적인 불길이 아니라 분열을 계속해서 하고 있는 핵연료였기 때문이죠. 결국 사태 진압의 지휘권은 소련 당국에 넘어갑니다. 소련 당국은 헬리콥터를 이용해 상공에서 붕소와 돌로마이트, 납, 진흙, 모래 등을 뿌렸지만 사태는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화재가 일어난 4호기 인근에 위치한 3호기가 무사하다는 것을 알게 됐고, 3호기에 있던 액체 질소를 4호기에 주입해 5월 9일 화재 진압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 시작이었습니다. 방사선의 누출은 심각했죠. 사고 첫날 방사선의 측정량은 3.6 뢴트겐이었지만, 이는 당시 사용된 측정기의 최대값이 3.6 뢴트겐이었기 때문이었죠. 이후 대형 측정기로 측정한 방사선량은 약 1만5000 뢴트겐이었습니다. 결국 소련 당국은 인근 주민들을 모두 대피시킵니다. 때문에 당시 번창하고 있던, 체르노빌 인근의 도시 프리피야트는 하루 아침에 모든 사람들이 떠나야했죠. 그러나 떠나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소련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수습을 위해 머리를 짜냈고, 결국 콘크리트 등으로 오염된 지역을 덮어버린 후, 미래를 야기하는 방법을 내놨죠. 물론 이 방법은 시행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사고가 일어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는 덮어버리는 방안밖에는 없었습니다. 소련 당국은 각지에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를 덮어버릴 석관을 제작해 조립했고, 1986년 10월 발전소를 덮어버리는데 성공합니다.

[역사속 오늘] 조선 방랑시인 김삿갓

[아시아타임즈=윤진석 기자] 조선 후기의 시인 김병연은 머리에 삿갓을 쓴 채 인생의 대부분을 방랑하며 김삿갓이라고 불립니다. 그가 김삿갓이라고 불린 것은 그가 떠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이름을 물을 때, '김립(金笠)'이라고 말한 것에서 유래됐다고 합니다. 1807년 4월 22일 안동 김씨 양반집의 아들로 태어난 김병연은 16살이 되었을 때 과거시험을 보는데요. 대과를 치루기 전 지역 지방관이 주재하는 향시에서 문제가 바로 김익순을 논박하는 것이었습니다. 김익순은 선천 부사 5품 관료인 무신으로 '홍경래의 난' 당시 홍경래에게 붙잡힙니다. 그러나 홍경래에게 목숨을 구걸해 풀려난 뒤, 홍경래의 참모 김창시의 수급을 조정에 가져오죠. 그러나 이는 거짓이었습니다. 실제로 김익순은 '홍경래의 난' 당시 반란군이 처들어오기도 전에 항복했고, 이후 홍경래가 내린 벼슬을 받았죠. 또한 홍경래의 난이 진압되자 김창시의 수급을 돈으로 산 다음 자신의 공으로 거짓말을 했던 것이죠. 김병연은 이에 향시에서 김익순에 대해 비난하는 등의 내용을 제출하고 급제하게 됩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급제를 자랑하던 김병연은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되는데, 바로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후 김병연은 4년간 집에만 틀어박힌 채 살았습니다. 또한 틀어박혀 살던 4년간 장수 황씨 황철주의 딸과 결혼하죠. 그러나 20살이 되던 해 그는 집을 떠나 방랑생활을 시작합니다. 이후 김병연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조선팔도를 돌아다닙니다. 또한 한 곳에 머물며 훈장 노릇을 하며 후학을 기르거나 숙식을 해결하기도 했습니다. 특히나 그가 지은 시는 당시 조선 사대부의 악덕과 부정부패, 조선사회의 폐해 등을 비판했고, 자연을 노래하는 것으로 명망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김병연의 시는 위트가 있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특히 그는 양반임에도 민중의 정서를 지니고 있던 것으로 알려져있는데요. 김병연의 일화를 살펴보면 어느 서당에서 밥을 얻어먹고자 서당 애를 불러 허락을 구했지만 훈장은 얼굴도 보이지 않고 애를 시켜 문전박대를 하자 그 자리에서 써내려갔다는 시를 썼습니다. 書堂乃早知 내 일찍이 서당인 줄 알았지만 房中皆尊物 방안에는 모두 귀한 분들일세 生徒諸未十 생도는 모두 열 명도 못 되고, 先生來不謁 선생은 와서 뵙지도 않네 그 뜻을 풀이하면 그저 비판하는 것이지만 실제 한자를 소리내어 읽으면 비속어로 들리죠. 이같은 시를 쓰며 전국을 누렸던 김병연은 1863년 57세의 나이에 전라도 동복현에 위치한 안 초시라는 사람의 사랑방에서 치료를 받던 중 숨지고 맙니다. 그의 시신은 그의 아들 김익균이 수습해 고향에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역사속 오늘] 영국과 영연방 왕국의 군주 엘리자베스 2세

[아시아타임즈=윤진석 기자] 현 영국을 비롯한 영연방 왕국의 국왕이자, 현재 전세계 생존한 군주들 중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군주이며, 가장 나이가 많은 군주인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는 25세에 왕위에 올라 현재까지 재위 중입니다. 1926년 4월 21일 태어난 엘리자베스 2세는 오늘로써 95세(한국 나이 96세)를 맞이합니다. 흔히 영국의 여왕으로 알려진 엘리자베스 2세는 1952년 즉위한 이래 영국 외에도 호주, 캐나다, 자메이카 등 16개국의 군주직을 겸하고 있기도 합니다. 때문에 엘리자베스 2세는 현재 3개 이상의 국가의 군주입니다. 엘리자베스 2세는 1926년 4월 21일 메이페어에서 조지 5세의 둘째 아들 요크 공작 앨버트 왕자(앨버트 프레더릭 아서 조지·조지 6세)와 요크 공작부인 엘리자베스(엘리자베스 안젤라 마거리트 보우스라이언·엘리자베스 1세)의 장녀로 타어납니다. 엘리자베스 2세는 1934년 그리스 왕국과 덴마크의 왕자를 만납니다. 이 왕자는 크리스티안 9세를 기준으로 7촌이며, 빅토리아 여왕을 기준으로 8촌인 먼 친척이었죠. 그러나 1939년 엘리자베스 2세는 이 왕자와 사랑에 빠져 편지를 주고 받았습니다. 이윽고 1947년 7월 9일 두 사람은 약혼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죠. 이 왕자가 지난 9일 향년 99세의 나이로 영면에 든 에든버러 공작 필립 마운트배튼 공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약혼은 몇몇의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당시 엘리자베스 2세는 왕위 계승 서열 1위로, 차기 왕위 계승자였고, 필립 왕자 역시 그리스 왕위 계승 서열 7위였습니다. 또한 당시 그리스 왕국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독일군의 침공을 받고 있었으며 그리스 내전 중이기도 했지요. 실제로 엘리자베스 1세는 필립 공과의 결혼을 반대했다고 합니다. 이에 필립 공은 결혼 전 그리스 왕국과 덴마크의 왕자 작위를 포기하고 외가의 성인 마운트배튼을 사용했습니다. 이후 엘리자베스 2세는 1948년 첫자식이자 영국 왕세자가 되는 찰스 필립 아서 조지를 낳았고, 2년 후 앤 엘리자베스 앨리스 루이즈 공주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1952년 2월 6일 그녀의 아버지이자 당시 영국의 국왕이었던 조지 6세가 서거하면서 그녀는 왕위에 오릅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이 때문에 찰스 왕세자와 앤 공주에게 많은 애정을 주지 못했다고 합니다. 왕위 계승과 영연방 왕국의 순방을 떠나야했던 엘리자베스 2세는 순방을 마치고 아이들과 상봉하던 순간을 회고하며 "아이들은 끔찍하게 예의가 발랐다. 나는 그때 아이들이 우리 부부가 누구인지 정말 몰랐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역사속 오늘] 최악의 기름 유출 사태 딥워터 호라이즌 폭발 사고

[아시아타임즈=윤진석 기자] 2010년 4월 20일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남쪽으로 200여㎞ 떨어진 국제 석유 업체 브리티시페트롤리엄(이하 BP)의 관할시추지역에서 시추선인 딥워터 호라이즌 석유 시추 시설이 폭발합니다. 이 폭발로 11명이 실종·사망했고, 17명이 중상을 입었죠. 또 딥워터 호라이즌 호는 폭발의 여파로 36시간 뒤 침몰했습니다. 그러나 재앙은 이제 막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딥워터 호라이즌 호가 가라않으면서 시추 파이프가 옆으로 쓰러진 것이죠. 부러진 시추 파이프에서는 원유가 유출되고 있었습니다. 해면을 덮은 유출된 기름의 범위는 남한 크기의 절반을 넘기는 6500㎢를 넘어섰고, 5월 기준 한반도의 면적을 넘어섰죠. 심지어 날씨에 따라 해수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다량이 기름덩어리들이 수중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했습니다. 이날 오후 9시 56분께 딥워터 호라이즌 호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심해 유정 내부에서 고압의 메탄가스가 급격히 분출돼 시추관으로 뿜어져 나온 것이 폭발한 것이었죠. 화재를 잡으려 여러대의 배를 동원해 소방작업에 나섰으나 결국 2010년 4월 22일 딥워터 호라이즌 호는 침몰하고 맙니다. 배가 침몰한 후, 대량의 원유가 유출되고 있는 것이 확인됩니다. 당시에는 폭발과 침몰 당시 시추선에서 흘러나온 원유로 파악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심해 시추공과 부러진 파이프에서 원유가 유출되고 있는 것을 확인합니다. 사고 초기에는 하루 1000배럴의 기름이 유출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으나 약 두달가량이 지난 6월 15일 하루 유출량이 3만5000∼6만 배럴이라고 추정했죠. 지난 2007년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태안 유조선 사고 당시 유출량은 7만8961.6배럴이었습니다. 6월 18일 존 케슬러 해양학자는 유출 중인 메탄가스가 해수에 녹아들어 수중 산소 함유량을 극단적으로 낮춰 죽은 바다를 만들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기합니다. 본래 심해 시추공에는 만일에 사태에 대비해 시추공을 잠그는 안전장치가 부착돼 있고, 이것은 딥워터 호라이즌의 시추공에도 설치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폭발 당시 안전장치가 작동하지 않았죠. 사고 후 BP는 무인 잠수정을 보내 이 안전장치를 잠그려는 시도를 하지만 전부 실패합니다. 5월 BP는 부러진 기름이 유출되는 세 곳의 구멍 중 한 곳을 막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이는 유출을 남은 두 곳으로 집중시킬 뿐, 전체적인 유출량을 줄이는 효과는 없었죠. 이후 14일 부러진 파이프에 작은 파이프를 꽃아 유출되는 원유량을 줄이려는 시도가 시작됩니다. 25일 진흙을 펌푸로 유출구멍에 넣어 압력을 줄이고, 시멘트를 이용해 구멍을 막아버리는 시도가 시행됩니다. 그러나 29일까지 3회의 시도 끝에 실패합니다. 29일 다른 시추 시설인 디스커버러 엔터프라이즈호를 불러와 시추구 위를 절단한 다음, 폭이 좁은 새 파이프를 넣어 유출되는 기름을 빼내는 방식을 시도하고 성공합니다. 그러나 유출량 조사팀은 파이프를 잘라낸 이후부터 더 많은 량이 기름이 유출되고 있다고 언급하죠. 이뿐만 아니라 6월까지 다양한 시도가 반복되고 유출량을 하루 1만5000배럴로 줄이는데 성공합니다. 7월 10일 타이완기업 TMT의 에어웨일호가 멕시코만 오염지역에 투입됩니다. 본래 에어웨일호는 원유와 철광석의 수송선이지만, 원유 유출사태 발생후 TMT사는 이 배를 대규모 기름제거선으로 개조하죠. 에어워일호는 8∼10시간동안 30만 배럴의 기름이 섞인 물을 빨아들여서 기름을 제거하고 물만 내보낼 수 있다고 전해졌죠. 7월 5일 BP는 하루 2만4980 배럴의 원유를 수거하고 5만7100만 평방피트의 천연가스를 태우고 있다고 발표합니다. 이후 7월 10일 기름이 유출되고 있는 시추구를 제거하고 딱 맞는 뚜껑을 끼우는 작업이 실시됩니다. 다만 이 작업에서 기존의 원유 직접수거를 할 수 없게 돼 약 500만 갤런(약 12만 배럴)의 원유가 유출됩니다. 이후 15일 새 뚜껑을 끼우는 작업이 성공하며 원유 유출이 중단됩니다. 이후 9월 19일 유정을 완전히 밀봉해 추가 원유 유출을 완전히 막는 것이 성공하죠. 그러나 이미 유출된 기름은 오랜 시간 노력해 제거해야했죠.

[잊지마, 기념일!] 4·19 혁명기념일 독재에 항거해 일으킨 민주주의 시민 혁명

[아시아타임즈=윤진석 기자] 4·19 혁명 기념일은 1960년 4월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해 일으킨 민주주의 시민 혁명인 4·19 혁명을 기념하기 위한 날입니다. 4·19 혁명은 우리나라 헌법에도 명시돼 있는데요. 2·28 학생 민주의거와 3·15 부정선거로 인한 시위로 일어나게됬죠. 이승만 정권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불법적인 개헌을 통해 12년간 장기 집권했습니다. 이후 1960년 3월 15일 제4대 정·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가 실시됐는데, 당시 당은 반공개 투표, 야당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 등의 3·15 부정선거를 자행했습니다. 이에 마산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이를 규탄하는 시위를 일으켰죠. 그러나 당시 정부는 이를 강제진압합니다. 또한 이 시위는 앞서 2월 28일 대구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던 2·28 학생 민주의거와 더불어 4·19 혁명의 시작이 되지요. 이후 3·15 부정선거 당시 실종됐던 고등학생 김주열 군이 시체로 발견됐고, 이에 시위는 더욱 격렬해져 갔습니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3000여명이 모여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하여 봉화를 높이들자'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했죠. 그러나 학생들이 시위를 끝나고 돌아가던 중 괴한들의 습격을 받고 몇명은 큰 부상을 입기까지 합니다. 이에 다음날인 19일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을 시작으로 단과생들과 서울 시내 대학생들이 합세했고, 이후에는 고등학생과 중학생들까지 대대적으로 시위대에 합류했습니다. 수백, 수천명의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항의하고 이승만 정부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며 쏟아져 나왔습니다.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일반 시민들까지 시위대에 동참했고, 이날 오후 1시 서울 시위대의 규모는 10만명에 육박했습니다. 이날의 유혈 사태는 이후 '피의 화요일'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시위대는 이승만이 있던 경무대(청와대)로 향하는데요. 이에 오후 1시 30분께 경찰들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시작합니다. 이후 오후 3시 정부는 서울지역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죠. 그러나 계엄군은 경찰과 달리 중립을 지킵니다. 당시 계엄군을 맡은 15사단의 사단장 조재미 준장은 계엄군에게 상관의 허가 없이 시위대에게 무단으로 발포하는 것을 금지하고, 민가 건물 무단 침입와 민근인들에게 음식 등을 제공 받는 것을 금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위대는 점차 진압되기 시작합니다. 유혈진압을 멈추지 않는 경찰과 탱크를 앞세워 압박하는 계엄군에 시위대는 너무나도 보잘 것 없었죠. 경찰에게서 탈취한 소총으로 무장하기도 했으나 결국 고려대학교로 쫒기도 맙니다. 시위대는 고려대 교정에서 최후의 저항을 준비합니다. 이때 사단장 조재미 준장은 단 두명의 부관만을 대동한 채 캠퍼스에 진입하죠. 이어 학교 강단에 들어간 그는 즐비하게 놓인 희생자들의 시신 앞에서 정중하고 깍듯한 태도로 조의를 표했다고 합니다. 이에 결국 시위대는 그 자리에서 전원 무기를 버리고 해산하고, 피의 화요일이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이승만 정부는 20일 대국민 담화에서 이날의 시위를 '난동'이라고 표현했죠. 이승만 정부에 미국은 등을 돌립니다. 당시 주한미국대사인 월터 패트릭 매카니기는 경무대를 방문해 '정당한 불만의 해결을 희망한다'고 요청했고, 이후 대사관으로 돌아와 학생들의 행동을 지지한다고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또한 미국 국무부장관은 주미 한국대사에게 항의각서를 보냈죠. 결국 21일 국무위원이 사표를 냈고, 23일 부통령이 사임서를 냈으며, 3·15 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은 당선 사퇴를 고려하겠다고 밝혔죠. 24일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했습니다. 그리고 25일 서울대 대학교수단의 시위가 시작됐습니다. 심지어 교수들은 선거재실시가 아닌,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며 시위를 했죠. 시위는 밤을 지나 26일까지 계속됐습니다. 부통령 당선자인 이기붕의 집은 파괴됐고, 파고다 공원의 이승만 동상은 군중들에 의해 철거됐습니다. 27일 이승만은 결국 사임서를 재출하면서 4·19 혁명의 막이 내리게 됩니다.

[역사속 오늘] 美정부의 강경진압과 그로인한 오클라호마시티 테러

[아시아타임즈=윤진석 기자] 1993년 4월 19일은 미국 텍사스주 웨이코에서 종교집단 다윗파와 미국 정부가 대립한 사건으로 미국 정부가 영유아와 임산부를 포함해 76명의 다윗파 신도를 살해한 사건입니다. 당시 연방정부는 종교집단 다윗파가 불법 총기를 매매하고, 미성년자를 성폭행하고, 마약 유통도 벌이고 있다고 의심했습니다. 이후 1993년 2월 다윗파 교주 데이비드 코레시에 대한 체포영장과 수색영장을 집행하려했죠. 그러나 총격전이 발발하게됩니다. 이로인해 신도 6명과 연방정부 요원 4명이 숨지게되죠. 연방정부 측은 다윗파에서 총격이 발생해 응사했다고 주장하고 있고, 다윗파 측은 밖에서 갑자기 총격이 시작됐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연방 요원의 사망에 결국 FBI까지 개입하게 되고 이후 51일간 대립상태에 돌입합니다. 정부는 장갑차와 헬기를 동원해 현장에 배치하고 신도들을 살인죄와 연방요원에 대한 살인 음모죄로 기소하죠. 4월 19일 FBI 측은 강경진압을 시도합니다. 이로인해 추후 연방정부는 과잉진압이란 비난을 받게 되는데요. 내부에 신도들이 방독면은 있지만 영유아들을 위한 방독면이 없다는 것을 알고도 최루가스를 살포했으며, 헬기로 조준사격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했죠. 강경진압으로 인해 다윗파 신도 중 어린이 21명과 임산부 2명을 포함해 76명이 숨지고 맙니다. 또한 이후 2년 뒤인 4월 19일 9·11 테러 이전까지 최악의 테러로 불리는 오클라호마 폭탄테러의 원인이 됩니다. 티머시 맥베이, 테리니컬스, 마이클 포티어 3명은 웨이코 참사 당시 연방정부의 강경진압에 분노해 이같은 테러를 계획하는데요.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들 셋이 모두 미합중국 육군 훈련소 동기였다는 점입니다. 특히 주범 맥베이는 걸프전쟁에 참여해 훈장도 받았었죠. 1995년 4월 19일 멕베이는 동료드이 구해온 2200㎏이 넘는 질산암모늄 비료와 니트로메탄, 경유를 트럭에 싣고 연방정부청사 주차장에 세워둔 뒤, 오전 9시 2분 기폭장치를 통해 폭발시킵니다. 이후 사건의 주범인 맥베이는 주 경찰이 고속도로를 순찰하던 중, 번호판이 없는 차를 보고 검문하는 도중에 무기를 발견해 체포합니다. 멕베이는 전혀 저항하고 않고 순순히 체포당했죠. 이 테러로 168명이 숨지고, 680여명이 부상을 당합니다. 또한 연방청사 내 탁아소가 있었기 때문에 어린이 19명이 희생됩니다. 이에 대해 맥베이는 법정에서 "저는 이 투쟁에서 연좌제를 정의하지 않았습니다. 그 법칙은 명문화하지 않았다면 침략자가 정한 것입니다. 그것은 성역 없이 잔인하였습니다. 여성과 어린이들은 웨이코 포위전과 루비 능선 작전 때에도 희생당했습니다. 당신들은 (정부의) 눈 앞에서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을 되돌리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결국 테리 니콜스는 종신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마이클 포티어는 법정에서 협력한 점을 고려해 징역 12년을 선고받았죠. 주범인 맥베이는 사형을 선고 받고, 2001년 6월 11일 미국 정부에서 38년만에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역사속 오늘] 나치 독일의 막을 내린 전투가 시작된 날

[아시아타임즈=윤진석 기자] 1945년 4월 16일 나치 독일의 막을 내리는 전투가 시작됩니다. 소비에트 연방과 나치 독일의 마지막 전투인 베를린 공방전은 1945년 4월 16일 시작돼 1945년 5월 2일 마무리됩니다. 1944년 독일은 열세에 몰렸습니다. 독일과 동맹을 맺었던 루마니아와 핀란드는 소련군 측으로 돌아섰고, 서쪽에서는 연합군이 프랑스를 해방시키며 압박했죠. 가을이 되자 당시 소련군은 독일군에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해 군을 재평성했습니다. 이에 당시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군을 서쪽으로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소련군은 곧 다시 진격했고 연합군과 함께 독일을 동쪽과 서쪽에서 압박했죠. 결국 독일은 궁지에 몰렸고, 소련군은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공략하기에 이릅니다. 소련군은 독일군의 3∼4배의 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독일군은 병력은 2차 세계대전동안의 전투로 부상자나 병자, 국민돌격대, 히틀러 유겐트의 소년병 등 질적으로도 소련군에 밀렸죠. 심지어 소련군을 물리친다고 해도, 그 뒤에는 서쪽에 위치한 연합군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젤로 고지 전투에서 승리하며 베를린을 포위한 소련군은 베를린을 포격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독일 중앙군을 지휘하던 페르디난트 쇠르너가 바우첸에서 선제공격을 통해 소련군을 어느정도 저지하는데 성공하지만 이를 과장해 보고했죠. 이후 히틀러는 펠릭스 슈타이너 대장에게 신 부대를 창설해 소련군을 막을 것을 요구하지만, 이미 독일군은 병력과 물자 모두 바닥을 친 이후였습니다. 심지어 호헨리헨에 위치한 하인리히 힘러는 추후 항복협상을 위해 약 2만명의 병력을 빼돌리기도 했죠. 4월 23일 히틀러는 슈타이너가 아직까지 공격하지 않은 것을 비난합니다. 히틀러의 참모진들은 슈타이너의 부대가 아직 제대로 편제조차 되지 않았다고 답했죠. 그리고 24일에도 슈타이너가 공격을 나서지 않자 히틀러는 "나는 전쟁에서 졌다!"고 소리쳤다고 전해졌죠. 영화 '다운폴(The Downfall)'에서도 이 당시 상황을 묘사했기도 하는데요. 히틀러가 슈타이너가 공격을 나서지 않은 사실을 깨닿자 독일군과 장교들을 배신자라고 비난하며 전쟁은 졌다고 말하죠. 또한 영화에서 히틀러는 탈출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실제로도 베를린이 완전히 포위될 때까지 히틀러는 탈출하지 않죠. 24일 쇠르너가 지휘하던 독일 중앙군은 결국 소련군의 역습에 패배합니다. 결국 29일 히틀러는 자신의 비서에게 카를 되니츠에게 독일 대통령의 직위를, 파울 요제프 괴벨스에게 독일 총리의 직위를, 페르디난트 쇠르너에게 육군 최고 사령관의 직위를 임명하는 유서를 작성하게 하고, 30일 극단적 선택을 합니다.

[역사속 오늘] 김해 돗대산 중국국제항공 129편 추락 사고

[아시아타임즈=윤진석 기자] 2002년 4월 5일 중국국제항공(에어차이나) 소속 CCA129편 여객기가 김해국제공항에서 4.6㎞ 떨어진 경상남도 심해시 돗대산에 추락합니다. 이 사고로 탑승인원 166명 중 기장과 승무원 2명을 포함한 37명이 생존하고, 부기장 2명을 포함한 129명이 숨지죠. 이날 오전 8시 40분(한국 시간 9시 40분) 베이징을 출발해 오전 11시 35분 김해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날 김해국제공항 상공에는 짙은 안개가 끼고 비가 내리고 있었으며, 바람마저 강하게 불고 있었죠. 이에 오전 8시 30분부터 정원 150명 이상의 항공기의 이착륙이 금지된 상태였습니다. 사고 여객기는 회황을 위해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했으나, 이후 김해국제공항의 기상상태가 완화돼 김해 국제공항에 착륙이 가능하다고 통보받아 오전 11시 20분 김해국제공항에 착륙허가를 요청했고, 승인됐습니다. 당시 바람으로 인해 여객기는 활주로 북쪽으로 들어와야했으나 김해국제공항의 활주로 북쪽에 산이 위치해 남쪽에서 활주로를 끼고 북쪽으로 돌아서서 착륙해야했죠. 그러나 당시 여객기의 기장과 부기장은 김해국제공항에 이같은 착륙이 처음이었고, 심지어 당시 김해국제공항에는 악천후와 안개에 구름까지 낮게 깔려있었죠. 여객기는 활주로를 끼고 남쪽에서 북쪽으로 선회해 들어와야 했지만 선회가 늦어졌고, 오전 11시 21분 여객기는 돗대산과 충돌하고 맙니다. 본래 김해국제공항은 ILS의 유도가 가능했으나 활주로 남쪽으로부터의 착륙만 가능했고, 북쪽은 조종사가 직접 눈으로 확인해 착륙해야 했지만 당시 구름과 안개로 인해 확인이 불가능했습니다. 심지어 에어차이나는 이같은 수동계기착륙 절차에 대한 교육도 제대로 하지 않았죠. 또한 김해국제공항에는 항공기가 정상고도 이하로 내려올 경우 추락위험을 경고해주는 예방장치인 MSAW가 설치돼 있기는 했으나 주변이 산지였기 때문에 오작동 빈도가 높았고, 화면과 소리로 경고를 해야되지만 오로지 화면에만 경고를 띄우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해당 여객기가 구형 레이더 장치를 이용하던 탓에 레이더가 돗대산으로 향하는 것을 '정상적인 착륙'으로 인식해 경고하지도 않았죠. 2005년 건설교통부 항공사고조사위원회는 사고의 원인으로 주 원인은 조종사들의 선회접근 절차에서의 오류와 늦은 복행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또한 당시 에어차이나는 유족들과 보상금 문제로 논란이 됐고, 시신은 안장되지 못했죠. 결국 보상금 문제로 인해 재판이 진행됐고, 2009년 대법원에서 유족 보상금 8억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임시 보관돼 있던 유골과 잘례 비용 등에 대해서는 대법원 판결에서 제외돼 있던 것이죠. 결국 사고 발생 후 10년만에 에어차이나 측에서 부담하는 것으로 최종 함의됐고, 2012년 10월 27일 유골들은 김해시에 위치한 희생자 추모공원 인근 봉안시설인 경남 영묘원에 안치됩니다.

[신간] 데이터 브랜딩/나만의 브랜딩을 위한 2주 책 쓰기/에이펙스 스피릿/고전수필의 맥을 잇는 현대수필 작법

[아시아타임즈=김지호 기자] ◆데이터 브랜딩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불확실성의 시대에도 흔들리지 않고 새로운 업계의 표준으로 거듭난 브랜드들이 있다. 구글, 애플, 아마존, 넷플릭스, 테슬라… 이들이 남들과 다른 '한 끗 차이'는 대체 무엇일까? 물과 공기처럼 공공재가 돼버린 데이터로 남들과 180도 다른 결과를 내는 브랜드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부터 다르다! 국내 최고의 광고회사들을 거치며 삼성, LG, 현대자동차 그룹 등 쟁쟁한 기업들의 브랜드 마케팅 경험을 갖춘 저자는 데이터와 브랜딩을 신선한 관점으로 연결지어 데이터 브랜딩의 입문서를 탄생시켰다. 빅데이터 분석으로 날카로운 통찰을 도출하는 “데이터 기반 전략가”가 대전환 시대의 복잡함과 불확실성을 돌파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것이다. 브랜드의 영향력이 점점 미약해지는 지금, 시장의 주도권은 기업에서 소비자로 넘어가 일방적인 마케팅은 고객을 불쾌하게 만들 뿐이다. 전형적인 브랜드의 역할을 깨고 거대한 변화에 맞서기 위해서는 현재 가지고 있는 낡은 사고와 전략을 모두 바꾸어야만 한다.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과 브랜드의 새로운 의미, 그리고 가장 디지털적인 것과 가장 인간적인 것을 결합해 스토리를 만드는 방법까지. 이 모든 것이 데이터의 가치를 높이고 브랜드를 혁신하는 '데이터 브랜딩'의 정의이자 존재 이유이다. 저자는 "손쉬운 검색과 공유의 무한 반복 속에서 브랜드는 더 이상 기존의 방식대로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없다. 브랜드는 우리 주변의 모든 정보를 가치 있는 것으로 발전시켜 그들만의 스토리로 만들어야 한다"며 "이 과정에 데이터가 함께한 검증과 반증이 동반돼야만 세상 사람들을 브랜드의 소비자로 끌어들일 수 있는 흡입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만의 브랜딩을 위한 2주 책 쓰기 이 책은 '책 쓰기'를 통해 1인 브랜딩으로 성공할 수 있는 방법과 다양한 채널을 활용해 마케팅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1인 브랜딩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 길을 가야 하는지, 제대로 알려주는 책은 없다. 1인 브랜드가 되고 싶은 갈증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이 시작됐다. 저자는 기업강사에서 시작해 책 출간을 통해 방송 출연, 사업까지 그 범위를 스스로 확장시켰다. 이 과정에서 얻은 노하우를 독자에게 나누고자 했다. '어떻게 하면 책을 쉽게 쓰고, 자신을 브랜드화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2주 만에도 책을 쓸 수 있도록, '쉽게 책 쓰는 방법'과 '다양한 채널을 통해 마케팅을 하는 방법'을 한 권으로 담아냈다. 1인 기업, 1인 창업, 1인 가구, 1인 브랜드. 그야말로 '1인 시대'가 대세다. 소위 유명인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누구든 자기를 '드러내는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펼친다면, 브랜딩이 가능한 시대다. 이 책은 '평생 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이 시대에서 '책 쓰기'를 통해 자신을 브랜드화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저자는 1인 브랜딩의 첫 번째 방법을 책 쓰기로 제시했는데, 단순히 글쓰기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자신을 홍보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시킬 수 있는지, 구체적인 노하우를 제시하고 있다. ◆에이펙스 스피릿 돈과 인연이 없던 한 저자에게 어느 날 인생을 바꾸는 만남이 찾아왔다. 우연히 엄청난 자산을 가진 슈퍼리치와 이야기를 나누게 된 그는, 돈과 부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스스로 돈을 밀쳐내는 현실을 만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에 충격을 받은 저자는 슈퍼리치의 소개를 통해 또 다른 슈퍼리치를 만나게 되었고, 이러한 만남은 무려 10년 가까이 이어졌다. 10년 동안 100명이 넘는 슈퍼리치를 만난 저자는 부자들에게는 그들만의 독특한 정신세계가 있음을 발견했으며, 그러한 정신세계를 '에이펙스 스피릿'이라 명명했다. 에이펙스란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 층에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들의 정신세계인 '에이펙스 스피릿'은 보통 사람과는 다른 20가지의 독특한 사고로 구성돼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실제 부자들의 생생하고도 현실적인 조언들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누구나 이름만 대면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도 등장하지만, 평범한 가정주부에서 사업가로 변신해 부자가 된 사람도 등장하고, 상상하기조차 힘든 부채를 떠안고 삶의 막장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일어나 부자가 된 사람도 등장하며, 평범한 직장인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슈퍼리치가 된 사람도 등장한다. 출신 배경이 다르고, 지나온 삶과 영위하는 사업이 다르며, 부자가 되기까지 거쳐 온 사연들도 달랐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누구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이 책에서 들려주는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 또한 큰 부자가 될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되고 구체적인 목표 또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돈에 대한 관점을 바꾸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말한다. 부자들의 돈에 대한 관점과 생각은 보통 사람과 완전히 다르다. 그들은 돈을 항상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돈을 마치 살아 있는 인격체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아주 적은 돈이라도 소중히 여겨 함부로 쓰지 않으며, 돈이 곧 시간이고 시간이 곧 돈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돈을 목숨처럼 아낀다. 이 책은 이렇게 슈퍼리치들의 돈에 대한 남다른 생각과 관점에서 시작해 그들의 습관, 태도, 관찰력, 실행력, 돌파력, 관계술 등 부자로 가는 길에 반드시 배우고 익혀야 할 20가지 역량들을 생생한 사례를 통해 제시한다. ◆고전수필의 맥을 잇는 현대수필 작법 이 책은 고전수필을 비평·분석해 현대수필이 고전수필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계승·발전시켰는가를 밝혔다. 지금까지 문단 어디에도 없던 책을 풍백미디어에서 출간해 고전수필과 현대수필이 창작(創作)을 매개로 계승·발전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 책에는 중ㆍ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고전수필 15편이 수록됐다.

[잊지마, 기념일] 자유로운 솔로들의 날, 블랙데이

[아시아타임즈=윤진석 기자] 기자가 거의 유일하게 좋아하는 14일 기념일인 블랙데이입니다. 오늘은 저의 날입니다. 네,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에 선물을 받지 못한 솔로들이 짜장면을 먹는다는 블랙데이입니다. 블랙데이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됐는지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습니다. 1990년대부터 연인이 없는 남녀 청소년들이 검은색 옷을 입고 끼리끼리 몰려다니면서 짜장면과 블랙커피, 아메리카노 등 검은색 음식을 먹으며 서로를 위로하는 날로 인식됐고, 이후 2000년대 들어 유행이 시작되면서 퍼져나가게됐다고 전해지죠. 또한 전달 14일 기념일인 화이트데이와 대비되도록 유래됐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외에도 솔로의 우울함을 블랙으로 표현했다는 설도 있죠. 사실 기자로써는 이해하기 힘들군요. 솔로로써 우울하다니요. 연인들이 서로 모여 아름다운 시간을 보낼동안 솔로는 자유로운 시간을 누릴 수 있습니다. 솔로가 얼마나 좋은데요. 흔히 14일 기념일은 '마케팅데이'라고 불리는데요. 사실 근거는 많이 부족합니다. 실제 중국집에서 블랙데이인 이날 매출이 크게 오르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사실 기자도 이날 굳이 짜장면을 먹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솔로의 장점은 자유로움입니다. 기념일따위에 얽겨 이 자유로움을 포기하다니 어리석은 짓이죠. 그러니 기자는 오늘 이 자유를 즐기려고 합니다. 오늘 무엇을 즐길거냐고요? 퇴근하고 집에서 씻고 밥먹고 게임하다 잘겁니다.

[역사속 오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침몰사고 '타이타닉'

[아시아타임즈=윤진석 기자] 1912년 4월 14일 2224명을 태운 채 영국 사우샘프턴에서 출항해 미국 뉴욕을 향해 출발한 당시 세계 최고의 여객선이 침몰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침몰사고인 타이타닉호 침몰사고는 20세기 초 최첨단 기술과 세계 최대의 규모의 초호화 유람선 RMS 타이타닉 호가 침몰한 사고로 영화 '타이타닉'으로도 유명합니다. 타이타닉호는 조선업체 화이트 스타 라인사의 RMS 올림픽호를 시작으로 운용한 세 척의 올림픽급 여객선 중 한 척으로 벨파스트의 해럴드&울프사가 1909년 건조를 시작해 1911년 진수됐죠. 타이타닉호는 속도부터 설비, 호화로움까지 모든 것을 당대 최고의 기술로 설계됐는데요. 실제로 안전에도 공을 드렸습니다. 타이타닉호의 방수 격벽은 16개의 구역으로 구분돼 2개구역까지 침수해도 침몰하지 않고 떠 있을 수 있도록 설계됐죠. 또한 격벽은 제어실에서 원격조작으로 즉시 폐쇄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타이타닉호는 현재 기준으로봐도 설계상으로는 안전한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서양선의 방수 격벽은 완전 밀폐가 아닌 상부 주 갑판에 구역이 모두 연결돼 있는 구조였고, 타이타닉호 역시 그러했습니다. 3구획 이상의 구획이 침수돼 배가 선수쪽으로 기울어 해수가 상부를 통해 다른 구획으로 유입돼 침수될 수 있는 결점이 존재했죠. 그리고 이 결점은 타이타닉호의 최초의 항해 때 발생하고 맙니다. 1912년 4월 14일 밤 11시 40분께 선원 프레드릭 플리트가 전방 450m 앞에 있는 빙산을 발견합니다. 이후 조타실에서 배를 좌현으로 방향을 돌리고, 만일에 사태를 대비해 보일러실의 방수격벽을 내릴 준비를 합니다. 빠른 대처였지만, 안타깝게도 빙산을 발견하는 것이 너무 늦었죠. 타이타닉호는 빙산과 정면 충돌은 피했지만, 우현 측면이 빙산과 충돌하게 됩니다. 타이타닉호의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은 타이타닉의 설계자 토머스 앤드루스와 피해상황을 점검합니다. 그러나 빙산과의 충돌로 인해 5구획에 6개의 구멍이 뚤려 침수돼고 있었고, 결국 침몰을 기다리게 됩니다. 타이타닉호 참사의 대한 원인 중 하나가 구명정의 부족으로 알려져 있는 부분이 있는데, 사실 타이타닉에 싣고 있었던 구명정의 수는 영국 상무성의 규정보다 더 많이 실려있었습니다. 다만, 타이타닉호의 침몰 당시 타이타닉호는 승객들은 알기 어려울 정도로 느리게 침몰했기 때문에 침몰 자체를 믿지 않고, 초기에 구명정에 타지 않은 인원도 있었죠. 배의 승객 중 한 명이었던 존 제이컵 아스터는 자신의 아내에게 "여기가 저 조그만 보트보다 안전해"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정원을 채우지 않고, 바다에 내려진 구명정도 많이 있었죠. 당시 구명정에 대한 교육이 부족했던데다가 사고로 인해 당황한 선원들은 정원을 다 채우지 않고 구명정을 띄워보냈습니다. 1912년 4월 15일 오전 12시 45분 타이타닉호에서 내려진 최초의 구명정은 28명만을 태운 채 바다에 띄워졌습니다. 이 구명정의 정원은 65명으로 최대 70명까지 태울 수 있었죠. 결국 2224명을 태운 타이타닉호는 710명만 구조된 채, 1514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킵니다.

[역사속 오늘] 4·13 호헌조치. 6월 항쟁의 불을 붙이다

[아시아타임즈=윤진석 기자] 1987년 4월 13일 당시 대한민국의 대통령 전두환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대해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민주화 운동이 확산될 움직임을 보이자, 특별담화를 통해 중대선언을 발표합니다. 4·13 호헌조치. 제5공화국 대통령 전두환이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거부하고, 일체의 개헌 논의를 중단시킨 조치입니다. 그리고 이 조치는 6월 항쟁을 일으키게 만들죠. 당시 대통령 선거는 간선제로, 체육관 선거로 불렸습니다. 4·13 호헌조치는 이를 직선제로 개헌하자는 논의를 88올림픽 이후로로 하고, 또한 후임 대통령은 하던대로 간선제로 뽑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임기중 지방자치제를 단계적으로 실시하겠다고 말하죠. 당시 정부는 이같은 조치가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반대였고, 오히려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불을 댕기는 역효과만 가져오죠. 전국 각지에서는 장기집권의 음모를 비난하고,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가 잇따랐습니다. 심지어 박종철 사건이 당국이 발표한 내용과 달리 고문치사로 인한 사망으로 드러나며 시위는 더욱 격렬해집니다. 1987년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리게 되고, 결국 당시 여당 총재 노태우는 시국수습방안을 발표해 헌법에 '5년 단임의 대통령을 직접 선거로 뽑는다'고 정해지게됩니다.

[역사속 오늘] 인류 최초로 우주비행에 성공

[아시아타임즈=윤진석 기자] 1961년 4월 12일 소련(현재 러시아)의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인류 최초의 유인우주선이 발사됩니다. 1시간하고 46분이라는 짧은 시간의 비행은 유리 알렉세예비치 가가린을 세계 최초의 우주비행사로 만들었죠. 유리 가가린은 이날 이즈베스티야와의 인터뷰에서 "우주는 매우 어두웠으나, 지구는 푸르렀습니다. 모든 것이 명확하게 보였습니다"라고 말했죠. 최초의 우주비행사였던 유리 가가린은 소련 스몰랜스크주 그자츠크 인근의 클루시노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목수 아버지와 목장 노동자 어머니를 둔 유리 가가린은 이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학교를 다니며 비행조종사의 꿈을 키웠습니다. 이후 1955년 오렌부르크에 위치한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한 가가린은 비행조종사로써 큰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바로 그의 키가 매우 작았던 탓이죠. 유리 가가린의 신장은 157㎝로 알려졌는데요. 그는 키 때문에 공군사관학교에서 퇴교의 위기에도 몰리게 됩니다. 유리 가가린은 2인용 훈련기의 착륙에 매우 서툴렀지요. 때문에 퇴교 위기에 노이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그는 한 번의 기회를 더 얻을 수 있었고, 교관이 시아 확보가 용이하도록 그의 좌석에 쿠션을 깔아서 성공적으로 착륙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유리 가가린은 1960년까지 상위로 진급하며 3급 비행사까지 오르는데요. 이후 소련 우주 개발의 아버지,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보스토크 계획에 참가합니다. 당시 보스토크 계획의 우주비행사 후보생은 약 3000명으로 이 중 총 19명만이 선발됩니다. 소련의 유인우주선 보스토크 1호의 캡슐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에는 제한이 존재했습니다. 바로, 170㎝ 이하의 키와 72㎏ 이하의 몸무계였죠. 그러나 당시 유리 가가린은 단신의 체형으로 조건에 부합해 보스토크 1호에 탑승할 수 있었습니다. 작은 키 때문에 공군 비행사에서 떨어질 뻔 한 그는 작은 키 덕분에 세계 최초의 우주비행사가 되지요.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을 성공한 그는 이후 소비에트연방영웅이라는 칭호를 받죠. 그는 이후 2년만에 대위에서 대령으로 승진하고, 우주비행사 훈련센터의 부센터장을 맡게 됩니다. 그러나 이후 다시 우주비행이 금지당하고 맙니다. 세계 최초의 우주비행사인 그에게 위험한 우주비행을 시킬 수 없다는 아이러니한 이유였죠. 그래도 유리 가가린은 우주 개발 계획 등에 계속해서 참여했습니다. 이후 있었던 소유즈 1호 미션 당시 백업으로 근무하기도 했죠. 이후 유리 가가린은 34세의 젊은 나이에 우주센터에서 근무하면서 정지됐던 전투조종사의 자격을 회복하기 위해 비행 훈련을 하던 도중 사고로 사망합니다.

[시승기] '뼛속'부터 다른 전기차, 현대차 '아이오닉5'

[아시아타임즈=천원기 기자] "와∼. 고속에서도 밟는 대로 나가네." '테슬라 킬러'로 불리는 현대차의 순수 전기차 '아이오닉5'를 타고 가장 강렬한 인상을 심어 준 부분은 고속에서의 펀치력이다. 최근 내연기관 자동차가 소위 끝물에 이르면서 '주행실력'이 절정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지만, 아이오닉5에 비할바는 아니었다. 아이오닉5 시승은 '전기차 전용 플랫폼'의 중요성을 몸소 체험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아이오닉5가 뼛속부터 '찐' 전기차라는 사실은 주행을 시작하면서 확실히 다가온다. 기존 내연기관은 물론 뼈대는 같고 전기모터와 배터리 등 파워트레인만 바꾼 전기차와도 주행질감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전장 4635mm, 전폭 1890mm, 전고 1605mm에 3000mm에 달하는 휠베이스를 뽑아낸 아이오닉5는 크기는 현대자동차의 준중형 SUV 투싼과 비슷하지만 휠베이스는 대형 SUV인 팰리세이드보다도 길다. 앞·뒤 바퀴를 양 끝까지 밀어 '황금비율'을 만들어 냈다. 얼핏 보면 달리기에 최적화된 '미드 쉽' 구조다. 실제 제로백도 5.2초에 불과하다. 배터리가 바닥에 깔려 무게 중심도 낮다. 덕분에 저속이나 막히는 도심 구간에서는 운전 피로가 낮고, 고속에서는 스포츠카 다운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고속직진안전성은 아쉬웠지만 코너를 파고드는 실력이나 순간 가속력, 추월 가속력 등이 만족스러워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그러면서도 승차감을 놓치지 않았다. 주행 소음이 기존 자동차와 비교해 획기적으로 줄어든 것도 돋보였다. 스티어링 휠에서 다이얼 방식으로 변경 가능 한 주행모드도 변화에 따라 성격이 명확했다. 아이오닉5는 에코, 노멀, 스포츠 등 3가지 주행 모드를 제공한다. 우리나라 최초이자 현대차 최초의 고유 모델인 '포니'를 현대적으로 재해석만 디자인도 나무랄 때가 없다. 해치백 스타일의 미래 지향적 디자인에 거리의 사람들이 아이오닉5를 힐끔 쳐다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파라매트릭 픽셀 헤드램프는 아름다워보이기까지했다. 디지털 사이드 미러는 이숙해지는데 시간이 다소 걸렸지만 역시 첨단 이미지를 부여한다. 컬럼 타입 전자식 변속 레버도 어색하긴 했다. 지붕 전체가 통유리로 되어 있는 비전 루프는 기존 내연기관차에도 흔이 탑재되지만 아이오닉5는 전기차라서 그런지 미래 지향적 기술로 다가왔다. 전기차 전용 플랫폼은 실내 구성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대형 세단에 버금가는 실내 공간을 확보했고, '유니버셜 아일랜드'는 가장 독특하다. 움직이는 센터콘솔로 최대 140mm까지 뒤로 밀어 1열과 2열 공간을 상황에 따라 연출할 수 있고, 넉넉한 수납공간도 마련됐다. 12인치 클러스터와 12인치 인포테인먼트는 하얀색 테두리로 포인트를 줬고, 헤드업 디스플레이도 시인성이 우수했다. 아이오닉5를 거대한 배터리로 사용할 수 있는 V2L 기능은 체험해보지 못했지만 캠핑에서 아주 실용적으로 쓰일 수 있는 기능이다. 반자율주행 기술도 최고 수준이다. 아이오닉5의 주행거리를 놓고 실망하는 이들도 있지만 막상 타본 아이오닉5는 그 부분에서도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시승차는 롱레인지 2WD 모델로 공인된 1회 충전거리는 401km로, 경쟁 모델로 지목됐던 테슬라 모델 Y보다 짧아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수준급의 회생제동력을 발휘해 실제 전비는 훨씬 좋았다. 급속충전기를 이용하면 18분만에 배터리 용량의 10%에서 80%까지 충전이 가능한 것도 아이오닉5의 경쟁력이다.

'주택 비전문가'로 채워진 국토부…기재부 등 외부 인사 투입

[아시아타임즈=김성은 기자] 국토교통부 장관과 그 산하 공기업 사장에 기획재정부, 국세청, 금융 분야 인사 등 국토부 외부 전문가들이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이번 인사는 LH 투기사태 등 국토부 안팎의 잡음이 이어져 조직혁신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내부 인사보다는 외부 인사가 적합하다는 판단이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권 임기 말 기재부와 연관된 부동산 세제 관련 대책에 기재부 및 금융전문가를 앉쳐 좀 더 빠른 속도의 대책 실행을 유도하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26일 국회 등에 따르면 내달 4일 노형욱 국토부 장관 내정자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열린다. 노 내정자는 기획재정부 출신의 '예산 전문가'로 통한다. 행정고시 30회로 공직에 입문해 기획예산처, 보건복지부 등을 거쳤다. 이후 복귀한 기재부에서 행정예산심의관, 사회예산심의관 등 예산실 주요 보직을 맡은 바 있다. 경제 관료인 노 내정자가 국토부 장관 자리에 오르는 것에 대해선 업계에서도 쉽게 예상치 못했다. 현재 국토부는 부동산 시장 안정화와 투기 근절이라는 큰 과제를 풀어야 하는 만큼 부동산 분야 전문가 등이 올 것으로 관측됐다. 노 내정자의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주택 비전문가'라는 점에서 우려의 시선도 있다. 변창흠 전 국토부 장관이 설계한 2.4대책을 이어받아 실질적인 주택공급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 하지만 노 내정자는 국무조정실에서 4년 가량 업무를 수행한 만큼 국정 이해도와 조율 능력이 높다는 평가다. 지난 2016년 국무조정실 국무2차장에 임명된 후 2018년 국무조정실장으로 지난해까지 근무했다. 노 내정자는 "국토부 소관 사항에 대해 국민 여러분이 걱정하시는 바를 잘 알고 있으며, 국민의 주거 안정과 부동산 투기 근절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국토부 산하 공기업인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장에는 김현준 전 국세청장이 임명됐다. 김 신임 사장은 행정고시 35회에 합격해 대전지방국세청 조사1국장,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실, 국세청 징세법무국장 등을 역임했다. 지난 2018년에는 서울지방국세청장과 2019년 국세청장을 지내기도 했다. 2만여명 규모의 거대한 국세청 조직을 운영하면서 부동산 투기 근절, 국세 행정개혁 등 세정분야에서 실적을 쌓은 김 사장의 경험이 투기 사태로 수술대에 오른 LH에 기여할 것으로 보고 있다. 김 사장 역시 주택이 주분야는 아니다. 이에 국토부의 오른팔로 2.4대책의 중추적 기능을 수행할 LH를 이끄는 것에 대해 기대와 우려의 시선이 교차하는 분위기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사장에는 권형택 전 김포골드라인 운영주식회사 대표가 지난 23일 취임했다. 권 신임 사장은 기재부 등 관료 출신은 아니지만 우리은행, 홍콩상하이은행(HSBC) 상무, 씨나이자산관리(C9 AMC) 등을 거친 '금융 전문가'다. 인천광역시 투자유치고문, 미단시티도시개발 부사장, 서울도시철도공사 전략사업본부장도 역임했다. 권 사장은 취임사를 통해 HUG의 내실 강화와 더불어 공공기관의 도덕적 해이에 대한 대책 마련을 강조하며 윤리경영을 공언했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정권 임기 말 정부에선 새로운 정책 시도보다 내부 기강을 잡고, 남은 정책들을 잘 마무리하는 데 중점을 둔 것 같다"고 인사에 대해 평했다.

중금리대출 35조원…포퓰리즘에 멍든 금융

[아시아타임즈=유승열 기자] 금융권에 대한 정치권의 생색내기 제도가 연이어 쏟아지고 있다. 금융당국은 서민들의 지원을 위해 중금리 대출 지원을 확대하기로 했고, 여당에서는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은 원리금을 감면받을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추진중이다. 금융권은 4.7재보궐선거 패배 원인이 정말로 금융권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며 정치권의 포퓰리즘 정책으로 금융권이 멍들고 있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26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위는 금융권의 중금리대출 요건을 낮추고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중금리대출 공급을 대폭 확대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금융위는 민간 중금리대출 확대를 위해 중·저신용층에 공급되는 모든 중금리대출를 통계로 집계해 인센티브를 제공하기로 했다. '신용점수 하위 50%(기존 신용등급 4등급 이하) 차주'에게 실행되고, 금리상한 요건을 충족하는 모든 비보증부 신용대출이라면 중금리대출 실적으로 인정받는다. 법정 최고금리 인하에 따라 중금리대출로 인정되는 금리상한도 낮췄다. 은행의 경우 10%에서 6.5%로, 상호금융은 12 8.5%로, 카드사는 14.5%에서에서 11.0%로 인하했다. 금융위는 올해 약 200만명에게 32조원, 내년에는 약 220만명에 35조원의 중금리대출이 공급될 것으로 예상했다. 특히 은행권의 공급 확대를 위해 중금리대출 공급액 일부를 가계부채 증가율 계산시 예외로 인정해주고, 실적을 경영실태 평가에도 반영하기로 한 만큼 실적 달성은 무난할 것으로 내다봤다. 은행 빚을 갚지 못하는 서민들에게 대출 원리금을 탕감하는 법도 추진되고 있다. 민형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2월 대표 발의한 '은행법 개정안'과 '금융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금소법) 개정안'은 재난시 정부 방역조치로 소득이 급감한 이들에게 대출 원금 감면 등을 해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은행법 개정안은 '재난으로 인해 영업 제한 또는 영업장 폐쇄 명령을 받거나 경제 여건 악화로 소득이 현격히 감소한 사업자 또는 그 사업자의 임대인은 대통령령에 따라 은행에 대출원금 감면, 상환기간 연장, 이자 상환 유예 등을 신청할 수 있다'는 내용을 신설했다. 이를 위반한 은행에는 20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한다. 금소법 개정안은 금융위가 '금융상품판매업자'에게 '금융소비자' 보호방안을 마련하도록 명할 수 있다는 내용을 넣었다. 은행법과 비슷하지만 적용 대상이 은행 외 다른 금융기관으로 확대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로 인한 영업 제한 등의 조치로 소상공인의 경제난이 가중됨에 따라 이자 상환 유예 등의 조치로 사회 안전망을 보완하자는 게 개정 취지다. 법안은 지난 22일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 회의에 상정돼 상임위 차원의 논의가 진행중이다. 금융권은 이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중금리대출의 확대 및 원리금 상환유예, 탕감은 정치권의 포퓰리즘 정책이라는 것이다. 우선 금융권은 정부가 인센티브 제공 등을 통해 금융권이 자율적으로 중금리 대출을 확대하도록 유도한다는 방침이지만, 사실상 공급계획을 발표하고 실적을 공시하도록 하는 것은 금융회사들에게 줄세우기를 시키도록 해 반강제적으로 대출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중금리대출이 중·저신용자를 대상으로 하는 만큼 연체리스크가 상대적으로 큰데, 여기에 외적 환경변화로 원리금을 탕감시키도록 법으로 규정하는 것은 은행의 건전성을 저해할 우려가 있고, 다른 금융소비자로의 비용 전가 등의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고 봤다. 원리금 감면도 시장 논리에 맞지 않는 불합리한 법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금소법은 금융상품 판매·자문에 있어 금융회사에 비해 정보나 협상력이 불리한 소비자를 보호하는 취지로 제정된 것으로, 재난 등 외적 환경변화에 따른 지원조치를 규정하는 것은 법 취지에 부합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은행연합회도 "은행에 과도한 부담을 주는 등 금융시장 전반에 대한 부작용이 우려된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은행들이 대출을 해주지 않아 여당이 심판 받았다는 생각에 은행을 더욱 쥐어짜는 포퓰리즘 정책들"이라며 "금융지원에 대한 생색은 정부가 내고 그 책임과 피해는 고스란히 은행에게만 전가시키려 하는 인식은 바뀌질 않는 듯 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