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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6월 22일 Tues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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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오늘] 최악의 기름 유출 사태 딥워터 호라이즌 폭발 사고

[아시아타임즈=윤진석 기자] 2010년 4월 20일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남쪽으로 200여㎞ 떨어진 국제 석유 업체 브리티시페트롤리엄(이하 BP)의 관할시추지역에서 시추선인 딥워터 호라이즌 석유 시추 시설이 폭발합니다. 이 폭발로 11명이 실종·사망했고, 17명이 중상을 입었죠. 또 딥워터 호라이즌 호는 폭발의 여파로 36시간 뒤 침몰했습니다. 그러나 재앙은 이제 막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딥워터 호라이즌 호가 가라않으면서 시추 파이프가 옆으로 쓰러진 것이죠. 부러진 시추 파이프에서는 원유가 유출되고 있었습니다. 해면을 덮은 유출된 기름의 범위는 남한 크기의 절반을 넘기는 6500㎢를 넘어섰고, 5월 기준 한반도의 면적을 넘어섰죠. 심지어 날씨에 따라 해수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다량이 기름덩어리들이 수중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했습니다. 이날 오후 9시 56분께 딥워터 호라이즌 호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심해 유정 내부에서 고압의 메탄가스가 급격히 분출돼 시추관으로 뿜어져 나온 것이 폭발한 것이었죠. 화재를 잡으려 여러대의 배를 동원해 소방작업에 나섰으나 결국 2010년 4월 22일 딥워터 호라이즌 호는 침몰하고 맙니다. 배가 침몰한 후, 대량의 원유가 유출되고 있는 것이 확인됩니다. 당시에는 폭발과 침몰 당시 시추선에서 흘러나온 원유로 파악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심해 시추공과 부러진 파이프에서 원유가 유출되고 있는 것을 확인합니다. 사고 초기에는 하루 1000배럴의 기름이 유출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으나 약 두달가량이 지난 6월 15일 하루 유출량이 3만5000∼6만 배럴이라고 추정했죠. 지난 2007년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태안 유조선 사고 당시 유출량은 7만8961.6배럴이었습니다. 6월 18일 존 케슬러 해양학자는 유출 중인 메탄가스가 해수에 녹아들어 수중 산소 함유량을 극단적으로 낮춰 죽은 바다를 만들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기합니다. 본래 심해 시추공에는 만일에 사태에 대비해 시추공을 잠그는 안전장치가 부착돼 있고, 이것은 딥워터 호라이즌의 시추공에도 설치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폭발 당시 안전장치가 작동하지 않았죠. 사고 후 BP는 무인 잠수정을 보내 이 안전장치를 잠그려는 시도를 하지만 전부 실패합니다. 5월 BP는 부러진 기름이 유출되는 세 곳의 구멍 중 한 곳을 막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이는 유출을 남은 두 곳으로 집중시킬 뿐, 전체적인 유출량을 줄이는 효과는 없었죠. 이후 14일 부러진 파이프에 작은 파이프를 꽃아 유출되는 원유량을 줄이려는 시도가 시작됩니다. 25일 진흙을 펌푸로 유출구멍에 넣어 압력을 줄이고, 시멘트를 이용해 구멍을 막아버리는 시도가 시행됩니다. 그러나 29일까지 3회의 시도 끝에 실패합니다. 29일 다른 시추 시설인 디스커버러 엔터프라이즈호를 불러와 시추구 위를 절단한 다음, 폭이 좁은 새 파이프를 넣어 유출되는 기름을 빼내는 방식을 시도하고 성공합니다. 그러나 유출량 조사팀은 파이프를 잘라낸 이후부터 더 많은 량이 기름이 유출되고 있다고 언급하죠. 이뿐만 아니라 6월까지 다양한 시도가 반복되고 유출량을 하루 1만5000배럴로 줄이는데 성공합니다. 7월 10일 타이완기업 TMT의 에어웨일호가 멕시코만 오염지역에 투입됩니다. 본래 에어웨일호는 원유와 철광석의 수송선이지만, 원유 유출사태 발생후 TMT사는 이 배를 대규모 기름제거선으로 개조하죠. 에어워일호는 8∼10시간동안 30만 배럴의 기름이 섞인 물을 빨아들여서 기름을 제거하고 물만 내보낼 수 있다고 전해졌죠. 7월 5일 BP는 하루 2만4980 배럴의 원유를 수거하고 5만7100만 평방피트의 천연가스를 태우고 있다고 발표합니다. 이후 7월 10일 기름이 유출되고 있는 시추구를 제거하고 딱 맞는 뚜껑을 끼우는 작업이 실시됩니다. 다만 이 작업에서 기존의 원유 직접수거를 할 수 없게 돼 약 500만 갤런(약 12만 배럴)의 원유가 유출됩니다. 이후 15일 새 뚜껑을 끼우는 작업이 성공하며 원유 유출이 중단됩니다. 이후 9월 19일 유정을 완전히 밀봉해 추가 원유 유출을 완전히 막는 것이 성공하죠. 그러나 이미 유출된 기름은 오랜 시간 노력해 제거해야했죠.

[잊지마, 기념일!] 4·19 혁명기념일 독재에 항거해 일으킨 민주주의 시민 혁명

[아시아타임즈=윤진석 기자] 4·19 혁명 기념일은 1960년 4월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해 일으킨 민주주의 시민 혁명인 4·19 혁명을 기념하기 위한 날입니다. 4·19 혁명은 우리나라 헌법에도 명시돼 있는데요. 2·28 학생 민주의거와 3·15 부정선거로 인한 시위로 일어나게됬죠. 이승만 정권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불법적인 개헌을 통해 12년간 장기 집권했습니다. 이후 1960년 3월 15일 제4대 정·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가 실시됐는데, 당시 당은 반공개 투표, 야당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 등의 3·15 부정선거를 자행했습니다. 이에 마산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이를 규탄하는 시위를 일으켰죠. 그러나 당시 정부는 이를 강제진압합니다. 또한 이 시위는 앞서 2월 28일 대구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던 2·28 학생 민주의거와 더불어 4·19 혁명의 시작이 되지요. 이후 3·15 부정선거 당시 실종됐던 고등학생 김주열 군이 시체로 발견됐고, 이에 시위는 더욱 격렬해져 갔습니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3000여명이 모여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하여 봉화를 높이들자'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했죠. 그러나 학생들이 시위를 끝나고 돌아가던 중 괴한들의 습격을 받고 몇명은 큰 부상을 입기까지 합니다. 이에 다음날인 19일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을 시작으로 단과생들과 서울 시내 대학생들이 합세했고, 이후에는 고등학생과 중학생들까지 대대적으로 시위대에 합류했습니다. 수백, 수천명의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항의하고 이승만 정부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며 쏟아져 나왔습니다.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일반 시민들까지 시위대에 동참했고, 이날 오후 1시 서울 시위대의 규모는 10만명에 육박했습니다. 이날의 유혈 사태는 이후 '피의 화요일'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시위대는 이승만이 있던 경무대(청와대)로 향하는데요. 이에 오후 1시 30분께 경찰들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시작합니다. 이후 오후 3시 정부는 서울지역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죠. 그러나 계엄군은 경찰과 달리 중립을 지킵니다. 당시 계엄군을 맡은 15사단의 사단장 조재미 준장은 계엄군에게 상관의 허가 없이 시위대에게 무단으로 발포하는 것을 금지하고, 민가 건물 무단 침입와 민근인들에게 음식 등을 제공 받는 것을 금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위대는 점차 진압되기 시작합니다. 유혈진압을 멈추지 않는 경찰과 탱크를 앞세워 압박하는 계엄군에 시위대는 너무나도 보잘 것 없었죠. 경찰에게서 탈취한 소총으로 무장하기도 했으나 결국 고려대학교로 쫒기도 맙니다. 시위대는 고려대 교정에서 최후의 저항을 준비합니다. 이때 사단장 조재미 준장은 단 두명의 부관만을 대동한 채 캠퍼스에 진입하죠. 이어 학교 강단에 들어간 그는 즐비하게 놓인 희생자들의 시신 앞에서 정중하고 깍듯한 태도로 조의를 표했다고 합니다. 이에 결국 시위대는 그 자리에서 전원 무기를 버리고 해산하고, 피의 화요일이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이승만 정부는 20일 대국민 담화에서 이날의 시위를 '난동'이라고 표현했죠. 이승만 정부에 미국은 등을 돌립니다. 당시 주한미국대사인 월터 패트릭 매카니기는 경무대를 방문해 '정당한 불만의 해결을 희망한다'고 요청했고, 이후 대사관으로 돌아와 학생들의 행동을 지지한다고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또한 미국 국무부장관은 주미 한국대사에게 항의각서를 보냈죠. 결국 21일 국무위원이 사표를 냈고, 23일 부통령이 사임서를 냈으며, 3·15 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은 당선 사퇴를 고려하겠다고 밝혔죠. 24일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했습니다. 그리고 25일 서울대 대학교수단의 시위가 시작됐습니다. 심지어 교수들은 선거재실시가 아닌,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며 시위를 했죠. 시위는 밤을 지나 26일까지 계속됐습니다. 부통령 당선자인 이기붕의 집은 파괴됐고, 파고다 공원의 이승만 동상은 군중들에 의해 철거됐습니다. 27일 이승만은 결국 사임서를 재출하면서 4·19 혁명의 막이 내리게 됩니다.

[역사속 오늘] 美정부의 강경진압과 그로인한 오클라호마시티 테러

[아시아타임즈=윤진석 기자] 1993년 4월 19일은 미국 텍사스주 웨이코에서 종교집단 다윗파와 미국 정부가 대립한 사건으로 미국 정부가 영유아와 임산부를 포함해 76명의 다윗파 신도를 살해한 사건입니다. 당시 연방정부는 종교집단 다윗파가 불법 총기를 매매하고, 미성년자를 성폭행하고, 마약 유통도 벌이고 있다고 의심했습니다. 이후 1993년 2월 다윗파 교주 데이비드 코레시에 대한 체포영장과 수색영장을 집행하려했죠. 그러나 총격전이 발발하게됩니다. 이로인해 신도 6명과 연방정부 요원 4명이 숨지게되죠. 연방정부 측은 다윗파에서 총격이 발생해 응사했다고 주장하고 있고, 다윗파 측은 밖에서 갑자기 총격이 시작됐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연방 요원의 사망에 결국 FBI까지 개입하게 되고 이후 51일간 대립상태에 돌입합니다. 정부는 장갑차와 헬기를 동원해 현장에 배치하고 신도들을 살인죄와 연방요원에 대한 살인 음모죄로 기소하죠. 4월 19일 FBI 측은 강경진압을 시도합니다. 이로인해 추후 연방정부는 과잉진압이란 비난을 받게 되는데요. 내부에 신도들이 방독면은 있지만 영유아들을 위한 방독면이 없다는 것을 알고도 최루가스를 살포했으며, 헬기로 조준사격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했죠. 강경진압으로 인해 다윗파 신도 중 어린이 21명과 임산부 2명을 포함해 76명이 숨지고 맙니다. 또한 이후 2년 뒤인 4월 19일 9·11 테러 이전까지 최악의 테러로 불리는 오클라호마 폭탄테러의 원인이 됩니다. 티머시 맥베이, 테리니컬스, 마이클 포티어 3명은 웨이코 참사 당시 연방정부의 강경진압에 분노해 이같은 테러를 계획하는데요.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들 셋이 모두 미합중국 육군 훈련소 동기였다는 점입니다. 특히 주범 맥베이는 걸프전쟁에 참여해 훈장도 받았었죠. 1995년 4월 19일 멕베이는 동료드이 구해온 2200㎏이 넘는 질산암모늄 비료와 니트로메탄, 경유를 트럭에 싣고 연방정부청사 주차장에 세워둔 뒤, 오전 9시 2분 기폭장치를 통해 폭발시킵니다. 이후 사건의 주범인 맥베이는 주 경찰이 고속도로를 순찰하던 중, 번호판이 없는 차를 보고 검문하는 도중에 무기를 발견해 체포합니다. 멕베이는 전혀 저항하고 않고 순순히 체포당했죠. 이 테러로 168명이 숨지고, 680여명이 부상을 당합니다. 또한 연방청사 내 탁아소가 있었기 때문에 어린이 19명이 희생됩니다. 이에 대해 맥베이는 법정에서 "저는 이 투쟁에서 연좌제를 정의하지 않았습니다. 그 법칙은 명문화하지 않았다면 침략자가 정한 것입니다. 그것은 성역 없이 잔인하였습니다. 여성과 어린이들은 웨이코 포위전과 루비 능선 작전 때에도 희생당했습니다. 당신들은 (정부의) 눈 앞에서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을 되돌리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결국 테리 니콜스는 종신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마이클 포티어는 법정에서 협력한 점을 고려해 징역 12년을 선고받았죠. 주범인 맥베이는 사형을 선고 받고, 2001년 6월 11일 미국 정부에서 38년만에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역사속 오늘] 나치 독일의 막을 내린 전투가 시작된 날

[아시아타임즈=윤진석 기자] 1945년 4월 16일 나치 독일의 막을 내리는 전투가 시작됩니다. 소비에트 연방과 나치 독일의 마지막 전투인 베를린 공방전은 1945년 4월 16일 시작돼 1945년 5월 2일 마무리됩니다. 1944년 독일은 열세에 몰렸습니다. 독일과 동맹을 맺었던 루마니아와 핀란드는 소련군 측으로 돌아섰고, 서쪽에서는 연합군이 프랑스를 해방시키며 압박했죠. 가을이 되자 당시 소련군은 독일군에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해 군을 재평성했습니다. 이에 당시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군을 서쪽으로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소련군은 곧 다시 진격했고 연합군과 함께 독일을 동쪽과 서쪽에서 압박했죠. 결국 독일은 궁지에 몰렸고, 소련군은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공략하기에 이릅니다. 소련군은 독일군의 3∼4배의 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독일군은 병력은 2차 세계대전동안의 전투로 부상자나 병자, 국민돌격대, 히틀러 유겐트의 소년병 등 질적으로도 소련군에 밀렸죠. 심지어 소련군을 물리친다고 해도, 그 뒤에는 서쪽에 위치한 연합군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젤로 고지 전투에서 승리하며 베를린을 포위한 소련군은 베를린을 포격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독일 중앙군을 지휘하던 페르디난트 쇠르너가 바우첸에서 선제공격을 통해 소련군을 어느정도 저지하는데 성공하지만 이를 과장해 보고했죠. 이후 히틀러는 펠릭스 슈타이너 대장에게 신 부대를 창설해 소련군을 막을 것을 요구하지만, 이미 독일군은 병력과 물자 모두 바닥을 친 이후였습니다. 심지어 호헨리헨에 위치한 하인리히 힘러는 추후 항복협상을 위해 약 2만명의 병력을 빼돌리기도 했죠. 4월 23일 히틀러는 슈타이너가 아직까지 공격하지 않은 것을 비난합니다. 히틀러의 참모진들은 슈타이너의 부대가 아직 제대로 편제조차 되지 않았다고 답했죠. 그리고 24일에도 슈타이너가 공격을 나서지 않자 히틀러는 "나는 전쟁에서 졌다!"고 소리쳤다고 전해졌죠. 영화 '다운폴(The Downfall)'에서도 이 당시 상황을 묘사했기도 하는데요. 히틀러가 슈타이너가 공격을 나서지 않은 사실을 깨닿자 독일군과 장교들을 배신자라고 비난하며 전쟁은 졌다고 말하죠. 또한 영화에서 히틀러는 탈출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실제로도 베를린이 완전히 포위될 때까지 히틀러는 탈출하지 않죠. 24일 쇠르너가 지휘하던 독일 중앙군은 결국 소련군의 역습에 패배합니다. 결국 29일 히틀러는 자신의 비서에게 카를 되니츠에게 독일 대통령의 직위를, 파울 요제프 괴벨스에게 독일 총리의 직위를, 페르디난트 쇠르너에게 육군 최고 사령관의 직위를 임명하는 유서를 작성하게 하고, 30일 극단적 선택을 합니다.

[역사속 오늘] 김해 돗대산 중국국제항공 129편 추락 사고

[아시아타임즈=윤진석 기자] 2002년 4월 5일 중국국제항공(에어차이나) 소속 CCA129편 여객기가 김해국제공항에서 4.6㎞ 떨어진 경상남도 심해시 돗대산에 추락합니다. 이 사고로 탑승인원 166명 중 기장과 승무원 2명을 포함한 37명이 생존하고, 부기장 2명을 포함한 129명이 숨지죠. 이날 오전 8시 40분(한국 시간 9시 40분) 베이징을 출발해 오전 11시 35분 김해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날 김해국제공항 상공에는 짙은 안개가 끼고 비가 내리고 있었으며, 바람마저 강하게 불고 있었죠. 이에 오전 8시 30분부터 정원 150명 이상의 항공기의 이착륙이 금지된 상태였습니다. 사고 여객기는 회황을 위해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했으나, 이후 김해국제공항의 기상상태가 완화돼 김해 국제공항에 착륙이 가능하다고 통보받아 오전 11시 20분 김해국제공항에 착륙허가를 요청했고, 승인됐습니다. 당시 바람으로 인해 여객기는 활주로 북쪽으로 들어와야했으나 김해국제공항의 활주로 북쪽에 산이 위치해 남쪽에서 활주로를 끼고 북쪽으로 돌아서서 착륙해야했죠. 그러나 당시 여객기의 기장과 부기장은 김해국제공항에 이같은 착륙이 처음이었고, 심지어 당시 김해국제공항에는 악천후와 안개에 구름까지 낮게 깔려있었죠. 여객기는 활주로를 끼고 남쪽에서 북쪽으로 선회해 들어와야 했지만 선회가 늦어졌고, 오전 11시 21분 여객기는 돗대산과 충돌하고 맙니다. 본래 김해국제공항은 ILS의 유도가 가능했으나 활주로 남쪽으로부터의 착륙만 가능했고, 북쪽은 조종사가 직접 눈으로 확인해 착륙해야 했지만 당시 구름과 안개로 인해 확인이 불가능했습니다. 심지어 에어차이나는 이같은 수동계기착륙 절차에 대한 교육도 제대로 하지 않았죠. 또한 김해국제공항에는 항공기가 정상고도 이하로 내려올 경우 추락위험을 경고해주는 예방장치인 MSAW가 설치돼 있기는 했으나 주변이 산지였기 때문에 오작동 빈도가 높았고, 화면과 소리로 경고를 해야되지만 오로지 화면에만 경고를 띄우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해당 여객기가 구형 레이더 장치를 이용하던 탓에 레이더가 돗대산으로 향하는 것을 '정상적인 착륙'으로 인식해 경고하지도 않았죠. 2005년 건설교통부 항공사고조사위원회는 사고의 원인으로 주 원인은 조종사들의 선회접근 절차에서의 오류와 늦은 복행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또한 당시 에어차이나는 유족들과 보상금 문제로 논란이 됐고, 시신은 안장되지 못했죠. 결국 보상금 문제로 인해 재판이 진행됐고, 2009년 대법원에서 유족 보상금 8억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임시 보관돼 있던 유골과 잘례 비용 등에 대해서는 대법원 판결에서 제외돼 있던 것이죠. 결국 사고 발생 후 10년만에 에어차이나 측에서 부담하는 것으로 최종 함의됐고, 2012년 10월 27일 유골들은 김해시에 위치한 희생자 추모공원 인근 봉안시설인 경남 영묘원에 안치됩니다.

[신간] 데이터 브랜딩/나만의 브랜딩을 위한 2주 책 쓰기/에이펙스 스피릿/고전수필의 맥을 잇는 현대수필 작법

[아시아타임즈=김지호 기자] ◆데이터 브랜딩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불확실성의 시대에도 흔들리지 않고 새로운 업계의 표준으로 거듭난 브랜드들이 있다. 구글, 애플, 아마존, 넷플릭스, 테슬라… 이들이 남들과 다른 '한 끗 차이'는 대체 무엇일까? 물과 공기처럼 공공재가 돼버린 데이터로 남들과 180도 다른 결과를 내는 브랜드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부터 다르다! 국내 최고의 광고회사들을 거치며 삼성, LG, 현대자동차 그룹 등 쟁쟁한 기업들의 브랜드 마케팅 경험을 갖춘 저자는 데이터와 브랜딩을 신선한 관점으로 연결지어 데이터 브랜딩의 입문서를 탄생시켰다. 빅데이터 분석으로 날카로운 통찰을 도출하는 “데이터 기반 전략가”가 대전환 시대의 복잡함과 불확실성을 돌파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것이다. 브랜드의 영향력이 점점 미약해지는 지금, 시장의 주도권은 기업에서 소비자로 넘어가 일방적인 마케팅은 고객을 불쾌하게 만들 뿐이다. 전형적인 브랜드의 역할을 깨고 거대한 변화에 맞서기 위해서는 현재 가지고 있는 낡은 사고와 전략을 모두 바꾸어야만 한다.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과 브랜드의 새로운 의미, 그리고 가장 디지털적인 것과 가장 인간적인 것을 결합해 스토리를 만드는 방법까지. 이 모든 것이 데이터의 가치를 높이고 브랜드를 혁신하는 '데이터 브랜딩'의 정의이자 존재 이유이다. 저자는 "손쉬운 검색과 공유의 무한 반복 속에서 브랜드는 더 이상 기존의 방식대로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없다. 브랜드는 우리 주변의 모든 정보를 가치 있는 것으로 발전시켜 그들만의 스토리로 만들어야 한다"며 "이 과정에 데이터가 함께한 검증과 반증이 동반돼야만 세상 사람들을 브랜드의 소비자로 끌어들일 수 있는 흡입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만의 브랜딩을 위한 2주 책 쓰기 이 책은 '책 쓰기'를 통해 1인 브랜딩으로 성공할 수 있는 방법과 다양한 채널을 활용해 마케팅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1인 브랜딩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 길을 가야 하는지, 제대로 알려주는 책은 없다. 1인 브랜드가 되고 싶은 갈증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이 시작됐다. 저자는 기업강사에서 시작해 책 출간을 통해 방송 출연, 사업까지 그 범위를 스스로 확장시켰다. 이 과정에서 얻은 노하우를 독자에게 나누고자 했다. '어떻게 하면 책을 쉽게 쓰고, 자신을 브랜드화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2주 만에도 책을 쓸 수 있도록, '쉽게 책 쓰는 방법'과 '다양한 채널을 통해 마케팅을 하는 방법'을 한 권으로 담아냈다. 1인 기업, 1인 창업, 1인 가구, 1인 브랜드. 그야말로 '1인 시대'가 대세다. 소위 유명인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누구든 자기를 '드러내는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펼친다면, 브랜딩이 가능한 시대다. 이 책은 '평생 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이 시대에서 '책 쓰기'를 통해 자신을 브랜드화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저자는 1인 브랜딩의 첫 번째 방법을 책 쓰기로 제시했는데, 단순히 글쓰기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자신을 홍보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시킬 수 있는지, 구체적인 노하우를 제시하고 있다. ◆에이펙스 스피릿 돈과 인연이 없던 한 저자에게 어느 날 인생을 바꾸는 만남이 찾아왔다. 우연히 엄청난 자산을 가진 슈퍼리치와 이야기를 나누게 된 그는, 돈과 부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스스로 돈을 밀쳐내는 현실을 만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에 충격을 받은 저자는 슈퍼리치의 소개를 통해 또 다른 슈퍼리치를 만나게 되었고, 이러한 만남은 무려 10년 가까이 이어졌다. 10년 동안 100명이 넘는 슈퍼리치를 만난 저자는 부자들에게는 그들만의 독특한 정신세계가 있음을 발견했으며, 그러한 정신세계를 '에이펙스 스피릿'이라 명명했다. 에이펙스란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 층에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들의 정신세계인 '에이펙스 스피릿'은 보통 사람과는 다른 20가지의 독특한 사고로 구성돼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실제 부자들의 생생하고도 현실적인 조언들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누구나 이름만 대면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도 등장하지만, 평범한 가정주부에서 사업가로 변신해 부자가 된 사람도 등장하고, 상상하기조차 힘든 부채를 떠안고 삶의 막장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일어나 부자가 된 사람도 등장하며, 평범한 직장인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슈퍼리치가 된 사람도 등장한다. 출신 배경이 다르고, 지나온 삶과 영위하는 사업이 다르며, 부자가 되기까지 거쳐 온 사연들도 달랐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누구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이 책에서 들려주는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 또한 큰 부자가 될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되고 구체적인 목표 또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돈에 대한 관점을 바꾸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말한다. 부자들의 돈에 대한 관점과 생각은 보통 사람과 완전히 다르다. 그들은 돈을 항상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돈을 마치 살아 있는 인격체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아주 적은 돈이라도 소중히 여겨 함부로 쓰지 않으며, 돈이 곧 시간이고 시간이 곧 돈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돈을 목숨처럼 아낀다. 이 책은 이렇게 슈퍼리치들의 돈에 대한 남다른 생각과 관점에서 시작해 그들의 습관, 태도, 관찰력, 실행력, 돌파력, 관계술 등 부자로 가는 길에 반드시 배우고 익혀야 할 20가지 역량들을 생생한 사례를 통해 제시한다. ◆고전수필의 맥을 잇는 현대수필 작법 이 책은 고전수필을 비평·분석해 현대수필이 고전수필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계승·발전시켰는가를 밝혔다. 지금까지 문단 어디에도 없던 책을 풍백미디어에서 출간해 고전수필과 현대수필이 창작(創作)을 매개로 계승·발전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 책에는 중ㆍ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고전수필 15편이 수록됐다.

[잊지마, 기념일] 자유로운 솔로들의 날, 블랙데이

[아시아타임즈=윤진석 기자] 기자가 거의 유일하게 좋아하는 14일 기념일인 블랙데이입니다. 오늘은 저의 날입니다. 네,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에 선물을 받지 못한 솔로들이 짜장면을 먹는다는 블랙데이입니다. 블랙데이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됐는지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습니다. 1990년대부터 연인이 없는 남녀 청소년들이 검은색 옷을 입고 끼리끼리 몰려다니면서 짜장면과 블랙커피, 아메리카노 등 검은색 음식을 먹으며 서로를 위로하는 날로 인식됐고, 이후 2000년대 들어 유행이 시작되면서 퍼져나가게됐다고 전해지죠. 또한 전달 14일 기념일인 화이트데이와 대비되도록 유래됐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외에도 솔로의 우울함을 블랙으로 표현했다는 설도 있죠. 사실 기자로써는 이해하기 힘들군요. 솔로로써 우울하다니요. 연인들이 서로 모여 아름다운 시간을 보낼동안 솔로는 자유로운 시간을 누릴 수 있습니다. 솔로가 얼마나 좋은데요. 흔히 14일 기념일은 '마케팅데이'라고 불리는데요. 사실 근거는 많이 부족합니다. 실제 중국집에서 블랙데이인 이날 매출이 크게 오르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사실 기자도 이날 굳이 짜장면을 먹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솔로의 장점은 자유로움입니다. 기념일따위에 얽겨 이 자유로움을 포기하다니 어리석은 짓이죠. 그러니 기자는 오늘 이 자유를 즐기려고 합니다. 오늘 무엇을 즐길거냐고요? 퇴근하고 집에서 씻고 밥먹고 게임하다 잘겁니다.

[역사속 오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침몰사고 '타이타닉'

[아시아타임즈=윤진석 기자] 1912년 4월 14일 2224명을 태운 채 영국 사우샘프턴에서 출항해 미국 뉴욕을 향해 출발한 당시 세계 최고의 여객선이 침몰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침몰사고인 타이타닉호 침몰사고는 20세기 초 최첨단 기술과 세계 최대의 규모의 초호화 유람선 RMS 타이타닉 호가 침몰한 사고로 영화 '타이타닉'으로도 유명합니다. 타이타닉호는 조선업체 화이트 스타 라인사의 RMS 올림픽호를 시작으로 운용한 세 척의 올림픽급 여객선 중 한 척으로 벨파스트의 해럴드&울프사가 1909년 건조를 시작해 1911년 진수됐죠. 타이타닉호는 속도부터 설비, 호화로움까지 모든 것을 당대 최고의 기술로 설계됐는데요. 실제로 안전에도 공을 드렸습니다. 타이타닉호의 방수 격벽은 16개의 구역으로 구분돼 2개구역까지 침수해도 침몰하지 않고 떠 있을 수 있도록 설계됐죠. 또한 격벽은 제어실에서 원격조작으로 즉시 폐쇄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타이타닉호는 현재 기준으로봐도 설계상으로는 안전한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서양선의 방수 격벽은 완전 밀폐가 아닌 상부 주 갑판에 구역이 모두 연결돼 있는 구조였고, 타이타닉호 역시 그러했습니다. 3구획 이상의 구획이 침수돼 배가 선수쪽으로 기울어 해수가 상부를 통해 다른 구획으로 유입돼 침수될 수 있는 결점이 존재했죠. 그리고 이 결점은 타이타닉호의 최초의 항해 때 발생하고 맙니다. 1912년 4월 14일 밤 11시 40분께 선원 프레드릭 플리트가 전방 450m 앞에 있는 빙산을 발견합니다. 이후 조타실에서 배를 좌현으로 방향을 돌리고, 만일에 사태를 대비해 보일러실의 방수격벽을 내릴 준비를 합니다. 빠른 대처였지만, 안타깝게도 빙산을 발견하는 것이 너무 늦었죠. 타이타닉호는 빙산과 정면 충돌은 피했지만, 우현 측면이 빙산과 충돌하게 됩니다. 타이타닉호의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은 타이타닉의 설계자 토머스 앤드루스와 피해상황을 점검합니다. 그러나 빙산과의 충돌로 인해 5구획에 6개의 구멍이 뚤려 침수돼고 있었고, 결국 침몰을 기다리게 됩니다. 타이타닉호 참사의 대한 원인 중 하나가 구명정의 부족으로 알려져 있는 부분이 있는데, 사실 타이타닉에 싣고 있었던 구명정의 수는 영국 상무성의 규정보다 더 많이 실려있었습니다. 다만, 타이타닉호의 침몰 당시 타이타닉호는 승객들은 알기 어려울 정도로 느리게 침몰했기 때문에 침몰 자체를 믿지 않고, 초기에 구명정에 타지 않은 인원도 있었죠. 배의 승객 중 한 명이었던 존 제이컵 아스터는 자신의 아내에게 "여기가 저 조그만 보트보다 안전해"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정원을 채우지 않고, 바다에 내려진 구명정도 많이 있었죠. 당시 구명정에 대한 교육이 부족했던데다가 사고로 인해 당황한 선원들은 정원을 다 채우지 않고 구명정을 띄워보냈습니다. 1912년 4월 15일 오전 12시 45분 타이타닉호에서 내려진 최초의 구명정은 28명만을 태운 채 바다에 띄워졌습니다. 이 구명정의 정원은 65명으로 최대 70명까지 태울 수 있었죠. 결국 2224명을 태운 타이타닉호는 710명만 구조된 채, 1514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킵니다.

[역사속 오늘] 4·13 호헌조치. 6월 항쟁의 불을 붙이다

[아시아타임즈=윤진석 기자] 1987년 4월 13일 당시 대한민국의 대통령 전두환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대해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민주화 운동이 확산될 움직임을 보이자, 특별담화를 통해 중대선언을 발표합니다. 4·13 호헌조치. 제5공화국 대통령 전두환이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거부하고, 일체의 개헌 논의를 중단시킨 조치입니다. 그리고 이 조치는 6월 항쟁을 일으키게 만들죠. 당시 대통령 선거는 간선제로, 체육관 선거로 불렸습니다. 4·13 호헌조치는 이를 직선제로 개헌하자는 논의를 88올림픽 이후로로 하고, 또한 후임 대통령은 하던대로 간선제로 뽑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임기중 지방자치제를 단계적으로 실시하겠다고 말하죠. 당시 정부는 이같은 조치가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반대였고, 오히려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불을 댕기는 역효과만 가져오죠. 전국 각지에서는 장기집권의 음모를 비난하고,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가 잇따랐습니다. 심지어 박종철 사건이 당국이 발표한 내용과 달리 고문치사로 인한 사망으로 드러나며 시위는 더욱 격렬해집니다. 1987년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리게 되고, 결국 당시 여당 총재 노태우는 시국수습방안을 발표해 헌법에 '5년 단임의 대통령을 직접 선거로 뽑는다'고 정해지게됩니다.

[역사속 오늘] 인류 최초로 우주비행에 성공

[아시아타임즈=윤진석 기자] 1961년 4월 12일 소련(현재 러시아)의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인류 최초의 유인우주선이 발사됩니다. 1시간하고 46분이라는 짧은 시간의 비행은 유리 알렉세예비치 가가린을 세계 최초의 우주비행사로 만들었죠. 유리 가가린은 이날 이즈베스티야와의 인터뷰에서 "우주는 매우 어두웠으나, 지구는 푸르렀습니다. 모든 것이 명확하게 보였습니다"라고 말했죠. 최초의 우주비행사였던 유리 가가린은 소련 스몰랜스크주 그자츠크 인근의 클루시노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목수 아버지와 목장 노동자 어머니를 둔 유리 가가린은 이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학교를 다니며 비행조종사의 꿈을 키웠습니다. 이후 1955년 오렌부르크에 위치한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한 가가린은 비행조종사로써 큰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바로 그의 키가 매우 작았던 탓이죠. 유리 가가린의 신장은 157㎝로 알려졌는데요. 그는 키 때문에 공군사관학교에서 퇴교의 위기에도 몰리게 됩니다. 유리 가가린은 2인용 훈련기의 착륙에 매우 서툴렀지요. 때문에 퇴교 위기에 노이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그는 한 번의 기회를 더 얻을 수 있었고, 교관이 시아 확보가 용이하도록 그의 좌석에 쿠션을 깔아서 성공적으로 착륙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유리 가가린은 1960년까지 상위로 진급하며 3급 비행사까지 오르는데요. 이후 소련 우주 개발의 아버지,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보스토크 계획에 참가합니다. 당시 보스토크 계획의 우주비행사 후보생은 약 3000명으로 이 중 총 19명만이 선발됩니다. 소련의 유인우주선 보스토크 1호의 캡슐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에는 제한이 존재했습니다. 바로, 170㎝ 이하의 키와 72㎏ 이하의 몸무계였죠. 그러나 당시 유리 가가린은 단신의 체형으로 조건에 부합해 보스토크 1호에 탑승할 수 있었습니다. 작은 키 때문에 공군 비행사에서 떨어질 뻔 한 그는 작은 키 덕분에 세계 최초의 우주비행사가 되지요.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을 성공한 그는 이후 소비에트연방영웅이라는 칭호를 받죠. 그는 이후 2년만에 대위에서 대령으로 승진하고, 우주비행사 훈련센터의 부센터장을 맡게 됩니다. 그러나 이후 다시 우주비행이 금지당하고 맙니다. 세계 최초의 우주비행사인 그에게 위험한 우주비행을 시킬 수 없다는 아이러니한 이유였죠. 그래도 유리 가가린은 우주 개발 계획 등에 계속해서 참여했습니다. 이후 있었던 소유즈 1호 미션 당시 백업으로 근무하기도 했죠. 이후 유리 가가린은 34세의 젊은 나이에 우주센터에서 근무하면서 정지됐던 전투조종사의 자격을 회복하기 위해 비행 훈련을 하던 도중 사고로 사망합니다.

[역사속 오늘] '가요계 전설'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아시아타임즈=박고은 기자] '난 알아요 이 밤이 흐르고 흐르면 누군가 나를 떠나 버려야 한다는 그 사실을 그 이유를 이제는 나도 알 수가 알 수가 있어요' 첫 멜로디만 들어도 모르는 분은 없겠지요?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 1집 '난 알아요' 인데요. 29년 전인 오늘 1992년 4월 11일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한 날이랍니다. 1991년에 결성된 3인조 그룹인 서태지와 아이들은 대한민국 가요계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오고, 큰 지각 변동을 일으킨 팀이라는 평가받을 정도로 대단했는데요. 영미권 대중음악계의 '비틀즈', '마이클 잭슨'이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있을 정도로 말이지요. 이들의 영향력이 매우 컷던 이유엔 당시 전문가들 사이에서 '한국어는 구조상 랩이 불가능하다'라는 생각이 많았는데, 선입견을 깨고 댄스와 랩을 대중화시켰기 때문인데요. 2집 하여가에서 최초로 국악과 힙합, 헤비메탈을 접목하고 3집에서는 랩 메탈, 4집에서는 갱스터 랩 등의 앨범을 들고 나오는 것이 대한민국 가요계에 신선한 변화를 가져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규모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던 이들도 영원할 수는 없었습니다. 1996년 돌연 해체·은퇴 선언하며 역사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는데요. 서태지는 성균관 유림회관 기자회견장에서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보여줬다"라고 말을 남기며 갑작스럽게 잠적하게 되지요. 당시 이들의 은퇴 소식은 전 사회적인 충격이었답니다. 3개 방송사 9시 뉴스의 메인으로 소개되는가하면 각 일간지의 1면을 장식하기도 했지요. 일각에선 조직폭력배가 은퇴에 개입했다는 괴상한 소문까지 나돌기도 했답니다. 은퇴 선언 이후 미국으로 떠난 서태지는 1년여간 아무런 음악적 활동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다 이후 록 위주의 음악 활동을 하고 있으며, 나머지 멤버 양현석과 이주노는 각각 음반 기획자와 안무가로 활동하고 있답니다. 대한민국 음악계의 판도를 바꿨던 서태지와 아이들. 90년대 미친듯이 열광했던 그때 그 시절을 생각하게끔 만드는 역사속 오늘이었습니다.

[펫 스토리] 댕댕이, 배변할 때 주인 왜 쳐다볼까?

[아시아타임즈=박고은 기자] "우리집 강아지는 배변할 때 저를 빤히 쳐다봐요." 견주분들이 한번 쯤은 경험해봤을 이야기인데요. 사랑스러운 우리 강아지와 산책 중에 배변을 할 때 나를 빤히 쳐다보면 같이 마주봐야 하는지 아니면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기 위해 시선을 피해주는 것이 맞는지 은근 고민되곤 합니다. 강아지가 야외에서 배변을 할 때 보호자를 빤히 쳐다보는 행동은 보통 누군가의 공격이나 다른 자극에 방어할 수 없는 취약한 상태이니 자신을 지켜달라, 보호해달라는 뜻이 담겨있답니다. 따라서 이때 보호자가 강아지의 시선을 피하게 된다면 강아지는 불안한 마음에 배변을 하다가 바로 중단하고 자리를 이탈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으니 굳이 시선을 피해줄 필요가 없어요. 이런 이유뿐 아니라 배변훈련 과정에서 많이 혼났던 아이들의 경우엔 자신이 올바른 장소에 볼일을 잘 보고있는지 보호자의 눈치를 살피며 확인하는 행동이기도 있기도 한데요. 어쨋거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강아지가 보호자를 믿기 때문에 바라보는거랍니다. 만약 신뢰가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요. 그러니 우리 댕댕이가 배변할 때 빤히 쳐다본다면 '부드러운 눈싸움'을 해주세요∼

[펫 스토리] 댕댕이 털, 꼭 말려줘야할까?

[아시아타임즈=박고은 기자] 옷도 건조기보다 자연 건조를 하는 것이 옷감 손상을 막아줘서 더 좋고, 사람의 머리카락도 헤어드라이기를 사용하는 것보다 수건으로 두피에 있는 물기를 닦고 자연 그대로 건조시키는게 가장 좋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과연 강아지들의 털도 자연 건조가 더 좋은걸까. 사실 대부분의 강아지들은 드라이기 바람이 너무 뜨거웠거나, 소리가 시끄러워서 등의 이유로 털을 말리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아하는데요. 그래서 일부 견주의 경우엔 그냥 자연 건조시켜도 되는걸까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강아지들은 목욕만큼이나 중요한게 드라이 단계라고 해요, 그 이유는 털이 젖은 후 축축한 상태로 오래 방치하게 되면 세균이 번식하기 쉬운 환경이 된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되면 피부에 습진이나 피부병이 생길 수 있어 제대로 바싹하게 말려주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합니다. 특히 귀가 뾰족하게 서 있지 않고 쳐진 리트리버, 비글, 코커스페니얼 같은 종은 목욕 이후에 물기가 남아 귓병이 생기기가 아주 쉽다고 해요. 물론 귀까지 말리는 것을 좋아하는 강아지는 없겠지만, 가능하면 이 같은 종들은 귀 안쪽까지 잘 말려줘야 귓병을 예방할 수 있겠습니다. 강아지 털말리기에서 무작정 드라이기를 들이미는 것보다 천천히 단계별로 적응하게 만들어준다면 드라이기를 싫어하는 강아지들도 조금씩 편해질 수 있습니다. 시간이 걸려도 견주분들이 잘 도와주세요∼

[잊지마, 기념일!] "의료진에 위로·감사를"…오늘 '세계 보건의 날'

[아시아타임즈=박고은 기자] 많은 분들이 모르고 생소하겠지만 오늘은 '세계 보건의 날' 입니다. 국민 보건의식을 향상시키고 보건의료 및 복지 분야의 종사자를 격려하기 위해 제정된 국가기념일인데요. 1952년 4월 7일부터 시행된 세계 보건의 날은 구강의 날, 귀의 날, 약의 날 등 건강 및 보건과 관련된 기존의 기념일을 통합해 보건복지부가 주관하는 보건의 날로 지정했답니다. 국민건강증진법에서도 보건에 대한 국민의 이해와 관심을 높이기 위해 이날로부터 1주간을 건강주간으로 지정했으며,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역시 취지에 맞는 행사를 시행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하는 등 나름 특별한 날로 기념되고 있지요. 현재 코로나19 팬데믹이 1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데요. 매일 수많은 확진자가 곳곳에서 잇따라 발생하는 등 좀처럼 종식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날 0시 기준 신규 확진자 수도 진정국면에 접어들기 직전인 올해 1월 8일(674명) 이후 89일 만에 최다 기록인 668명까지 치솟기도 했는데, 이에 일각에선 '4차 대유행'이 현실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힘든 상황 속에서도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방역의 최전선에서 힘들게 싸우고 있는 세계 의료진들의 노고에 감사하는 하루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역사속 오늘] 프랑스, 미터법 채택하다

[아시아타임즈=윤진석 기자] 세계적인 단위의 기준으로 쓰이면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쓰이는 m(미터)는 1795년 4월 7일 프랑스에서 길이의 단위로 채택됐습니다. 미터의 기원은 단위를 뜻하는 그리스어 'μετρον'와 역시 단위를 뜻하는 프랑스어 'mètre'가 그 기원으로, 프랑스 정부는 당시 전세계적인 단위의 표준을 정할 필요성을 느끼고 미터법을 제정합니다. 이전에는 길이의 기준은 대부분 사람의 몸을 기준으로 했습니다. 팔꿈치에서 가운뎃손가락까지의 거리인 이집트의 '큐빗'과 그리스의 '핑거' 미국에서 사용하는 '야드파운드법'에서 쓰이는 '피트'는 영국에서 넘어온 도량형으로 '성인 평균 발 길이'를 뜻하죠. 이렇다보니 사람마다 체형에 따라 단위가 달라지는 문제가 발생했죠. 그러니 프랑스는 변하지 않는 대상을 기준으로 삼아 도량형으로 제작해야했죠. 그리고 채택된 방법이 바로 지구의 둘레의 길이인 자오선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지구의 적도에서 북극점까지의 거리를 1000만m(10000㎞)로 지정하고, 이를 위해 됭케르크부터 바르셀로나까지의 1000km를 직접 측정했죠. 그리해서 자오선을 4000만분의 1로 나눈 것이 1m로 하자는 안이 지정됩니다. 그러나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적도에서 남극점까지의 정확한 거리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적도에서 북극점까지의 거리를 1000만 분의 1로 나눈 것을 1m로 지정하죠. 그러나 1m의 현재 기준은 진공에서 빛이 1분의 2억9979만2458초 동안 진행한 거리로 정의됐는데요. 이는 당시의 측량기술의 부족으로 실제 자오선이 4000만m보다 조금 더 긴, 4000만7863m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미터를 제작하려면 현재 쓰이는 m보다 0.2㎜가 더 길어야했죠. 또한 그전까지 1m의 기준을 정하는 표준 원기는 금속물질로 제작됐지만 금속의 특성상 온도와 습기 등 환경에 따라 미세한 변화가 존재했죠. 최초 1795년 황동으로 된 임시 미터의 원기를 제작했으나, 변화가 나타났고, 1799년 백금으로 다시 제작됐으나, 백금도 시간과 환경에 따라 변화됐습니다. 1889년에는 단면이 X자이며, 백금-이리듐 합금으로 된 국제 미터 원기를 제작했지만 그럼에도 변화가 생겼죠. 금속 등 '물질'로 원기를 제작한다면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마모된다는 문제가 있던 것이죠. 때문에 1960년 크립톤 원자가 방출하는 빛의 파장을 기준으로 1m의 정의를 채택합니다. 진공에서 크립톤-86 원자의 2p10과 5d5 준위 사이의 전이에 해당하는 복사 파장의 1650763.73배를 1m의 정의로 정한 것이죠. 그러나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결국 이 정의도 변화합니다. 크립톤 원자가 열운동을 하기 때문에 파장이 미미하게 분산돼 단일한 값이 잘 나오지 않았던 것이죠. 이에 1983년 1m의 정의는 진공에서 빛이 1분의 2억9979만2458초 동안 진행한 거리로 정의하게 됩니다.

[역사속 오늘] 르네상스 3대 화가 라파엘로의 순결한 사랑

[아시아타임즈=윤진석 기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등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3대 화가 중 한 명인 라파엘로 산치오는 1483년 4월 6일 우르비노 공국의 궁정화가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일찍 부모를 여읜 라파엘로는 1499년 페루자에서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그림공방에 들어가 도제수업을 받았죠. 이후 그는 페루지노풍의 기법을 익히며 '성 미카엘(루브르미술관)', '성 게오르기우스(루브르미술관)', '성모대관(바티칸미술관)', '그리스도의 책형(磔刑)(런던)', '스포잘리치오(성모의 결혼·밀라노)' 등의 작품을 탄생시킵니다. 이후 1504년 피렌체로 이주한 그는 F.바르톨로메오나 다 빈치의 영향을 받고 피렌체풍 화법으로 발전합니다. 이후 라파엘로는 1508년 로마로 건너갔고, 당시 로마 교황이었던 율리우스 2세를 위한 바티칸 궁정의 스탄체 서명실 벽화를 그립니다. 또한 이 시기에 '어느 추기경의 초상', '토마소 잉기라미의 초상', '폴리뇨의 성모', '갈라테아의 승리' 등의 걸작을 남기죠. 또한 로마에 있던 동안 베네치아파 화가 세바스티아노 델 피온보와 교류하며 그의 채화법을 배우기도 합니다. 라파엘로는 그림뿐만 아니라 건축에도 영향을 끼쳤는데요. 1514년 성베드로대성당의 건조에 관계했고, 이후 1517년까지 바티칸 궁정의 스탙차델 인첸디오 벽화장식에도 종사했습니다. 이후 라파엘로는 궁정화가로써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며 명성을 뽑내면서도 '레오 10세의 초상' 등 화가로서의 뛰어남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1520년 4월 6일 로마에서 자신의 생일에 37세의 나이로 요절하게 됩니다. 사후 그의 유해는 로마의 판테온에 안치됐습니다. 라파엘로는 죽을 때까지 독신이었는데, 마르게리타 루티라는 여인과 동거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마르게리타는 라 포르나리나라는 별칭을 가진 이로, 그의 '성모 마리아' 작품들과 '라 벨레타', '라 포르나리나'의 모델로 추정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당시 동거를 하면서도 라파엘로와 마르게리타가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로는 바로 라파엘로가 약혼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정됩니다. 당시 라파엘로는 메디치 비비에나 추기경의 조카딸과 약혼한 상태였는데 마르게리타는 제빵사의 딸로 추기경의 조카딸과 파혼하고, 제빵사의 딸과 결혼할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보낼 수 없었기 때문에 약혼만 한 상태로 평생을 지냈다고 추정됩니다. '라 포르나리나'는 제빵사의 딸이란 뜻으로 그의 작품 속 여인은 왼손에 약혼반지를 끼고 있으며, 팔에는 '우르비노의 라파엘로'라고 새겨진 리본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반지는 누군가에게 덧칠돼 지워졌다가 이후 500여년이 지난 2001년 복원과정에서 밝혀지게 되지요. 실제로 이 이야기는 지난 2014년 MBC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 방영되기도 했습니다.

[역사속 오늘] '전설의 밴드' 비틀즈, 빌보드 차트 점령

[아시아타임즈=박고은 기자] 2021년 현재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지명도가 높은 팝 가수를 꼽으라면 누가 뭐라해도 '방탄소년단(BTS)' 이겠지요. 현재에 이런 BTS가 있다면 과거엔 '비틀즈' 였답니다. 사실 팝에 'ㅍ' 자도 모르는 사람도 비틀즈라는 이름만 꺼내도 다 알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비틀즈는 영국 잉글랜드 리버풀 출신의 4인조 록 밴드로, 1963년 공식적인 첫 정규앨범인 'please please me'를 시작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된 그룹이랍니다. 당시 비틀즈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는데요. 미국에서 판매된 음반의 60%가 이들의 음반이었으며, 라이브 공연이 있는 날에는 청소년들이 모조리 비틀즈의 공연을 보러가 청소년 범죄가 단 1건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전언이 있을 정도였지요. 이렇게 미국의 음반 시장을 단숨에 점령한 비틀즈는 압도적 성공으로 약 57년 전인 오늘. 1964년 4월 4일 미국 주요 싱글 차트인 '빌보드 핫 100' 에서 1~5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또한 앨범 차트인 '빌보드 200' 에서도 1, 2위를 기록하기도 하지요. 음악시장에서 매우 혁신적인 시도로 대중에 큰 충격을 줬던 비틀즈. 이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여러 음악 장르가 탄생하지 않았을까하는 역사속 오늘이었습니다.

'광복절부터 4일 휴무, 한 발짝 더'⋯대체공휴일 확대법, 국회 행안위 소위 통과(종합)

[아시아타임즈=김영봉 기자] 주말과 겹쳐 사라진 공휴일을 부활시키는 대체공휴일 확대법이 22일 여당 단독으로 국회 행정안전위원회(행안위) 법안심사소위를 통과했다. 앞서 정부가 5인 미만 사업장은 유급 휴가 적용 대상에서 제외한 현 근로기준법과 충돌한다며 반대 입장을 밝혔는데, 결국 여당은 5인 미만 사업장을 제외하고 대체공휴일 확대법을 처리키로 한 것이다. 이제 남은 절차는 국회 행안위 전체회의를 거쳐 법사위를 통과하고 본회의에 회부되는 일만 남았다. 여당이 6월 내 해당 법안을 처리하는데 의지를 보이면서 사실상 오는 8월15일 광복절부터는 대체공휴일이 적용될 전망이다. 대체공휴일이 본회의 문턱을 넘을 경우 올해 하반기 주말에 가려 사라진 광복절과 개천절, 한글날, 성탄절 등 4일은 부활한다. 예컨대 8월15일 광복절 다음 날인 월요일인 16일 대체공휴일이 적용되는 것이다. 국회는 대체공휴일 확대법이 시행될 경우 국민 휴식뿐만 아니라 내수경제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서영교 행안위 위원장은 “올해는 현충일을 비롯해 광복절과 개천절, 한글날과 크리스마스가 전부 주말이다. 정해진 공휴일마저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에 많은 국민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다”며 “국민의 휴식권을 보장받기 위해 대체공휴일 추가 확대도입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서 위원장은 대체공휴일 확대법으로 인해 경제적 효과도 강조했다. 그는 지난해 현대경제연구원이 발표한 8·17임시공휴일 지정의 경제적 파급 영향 보고서를 인용, “대체공휴일이 시행되면 하루 소비지출은 2조1000억원, 경제 전체에 미치는 생산유발액은 4조2000억원에 달한다”고 예를 들었다. 예컨대 올해 대체공휴일 확대법이 실제 시행되면 4일 즉, 약 16조원의 경제효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5인 미만 사업장은 대체공휴일 적용대상에서 제외됐다는 점은 굉장히 아쉬운 대목이다. 약 360만명의 노동자가 쉬어도 유급 휴가가 적용이 안 되기 때문인데, 정부가 5인 미만 사업장은 적용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법률 대안을 가져오면서다. 한편 국민의힘 의원들은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는 360만 노동자를 제외하는 것은 국민 공휴일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며 의결에 불참했다.

중국발 채굴장 폐쇄…비트코인 '날개없는 추락'

[아시아타임즈=정종진 기자] 가상자산 맏형격인 비트코인 가격이 날개없이 추락하고 있다. 전세계 비트코인 채굴량의 60% 가량을 차지하는 중국이 채굴장을 전면 폐쇄키로 한 것이 악재로 꼽힌다. 22일 가상자산 거래소 업비트에 따르면, 이날 오후 5시 기준 비트코인 1개당 가격은 3769만원선에서 거래를 이어갔다. 이날 한때 비트코인은 3700만원대가 깨져 3634만원까지 곤두박칠 치기도 했다. 맏형격인 비트코인 가격이 떨어지자 이더리움, 리플 등 다른 주요 코인들도 가격이 급락한 상황이다. 가상자산들의 급락은 전세계 비트코인 채굴의 60% 가량을 차지하는 중국이 비트코인 채굴 단속을 한층 강화한 여파로 풀이된다. 외신 등에 따르면 중국 당국은 앞서 네이멍 자치구와 칭하이성, 신장위구르 자치구, 윈난성 등에 이어 마지막 남은 비트코인 채굴업장인 쓰촨성에서까지 채굴을 중단토록 조치했다. 가상자산업계에서는 이번 조치에 따라 쓰촨성의 비트코인 채굴능력의 90% 이상, 비트코인 거래 능력의 30% 이상 감소한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1분기 호실적에도…보험사, 중장기 이익 확보 '안간힘'

[아시아타임즈=신도 기자] 보험사들이 신계약가치 제고에 매달리고 있다. 지난 1분기 업계의 안정적 실적에도 불투명한 보험 수익성 때문에 마진이 높은 상품 중심 전략을 추진키 위해서다. 손해보험사의 경우 장기인보험을 중심으로 포트폴리오를 강화하겠다는 계획도 수립했다. 22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도 보험업계는 지난 1분기 높은 실적을 기록했다. 삼성·한화·교보생명 등 생명보험사 '빅3(Big Three)'의 1분기 당기순이익은 1조8346억원으로 전년동기에 비해 46.4% 증가했다. 손보사도 지난 1분기 상당한 실적을 나타냈다. 삼성화재·현대해상·DB손보·메리츠화재·한화손보 등 주요 다섯개 손보사의 1분기 당기순이익은 9412억원으로 전년동기대비 76.6% 늘었다. 보험사들은 올 1분기 실적 증가를 일시적인 현상으로 해석했다. 생보사의 경우 삼성전자의 특별배당과 변액보증준비금 관련 손익 개선으로 이차익이 증가한 덕분이고, 자동차보험과 장기보험 손해율 감소의 영향이라는 해석이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실적 증가는 상품 등 이익구조 개선이 아니라 외부적 요인으로 인한 환경 변화와 일시적인 손해율 감소가 순이익 개선을 가져왔다"며 "중장기 측면에서 수익 불확실성은 여전하다"고 말했다. 불확실한 수익에 미래 수익성 개선에 사활을 건 보험사도 등장하고 있다. 농협생명과 메리츠화재, 롯데손보가 대표적으로, 이들 회사는 신계약가치를 중심으로 마진율이 높은 상품의 판매 등 포트폴리오 개선에 뛰어들고 있다. 신계약가치란 보험 계약 체결 후 만기가 유지되는 동안 발생할 수익을 현재 가치로 예측 환산한 지표다. 미래에 발생할 세후 이익을 측정한 것으로 신계약가치가 늘수록 보험사가 중장기 이익을 많이 확보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우선 농협생명은 김인태 사장이 체질개선을 통한 신계약가치 강화를 적극적으로 주문한 상태다. 수익성 개선을 위해 영업조직과 전속설계사 평가시 신계약가치 지표를 보다 세분화해 평가에 나서는 건 물론, 보장성 상품 중심의 포트폴리오 개선도 함께 추진한다. 농협생명이 고강도 체질 개선에 나서게 된 이유는 지난 1분기 위험률차손익이 개선된 덕분이다. 위험률차손익은 고객이 지불한 보험료 중 고객에게 실제 지급된 금액을 의미한다. 코로나19 때문에 야외 활동이 줄며 보험금 지급이 줄어든 것으로 일시적인 요인이다. 롯데손보는 지난 2019년 JKL파트너스 인수 후 지속적인 경영 위기에 노출됐다. 지난해는 포트폴리오 개선에 사활을 걸고 사옥 매각과 사장 교체라는 카드까지 꺼내든 끝에 적자였던 실적을 흑자로 돌려놨다. 덕분에 지난 1분기 신계약가치가 우수한 장기보장성 상품이 전년동기 대비 19.5% 성장하는 등 효과도 봤다. 손해율은 85.6%로 전년동기 90.1%에서 4.5%포인트 개선됐다. 사실상 장기로 계약하는 보장성 상품이 상품 운영에서 안정성을 가져온 것이다. 장기상품에는 롯데손보만 뛰어든 게 아니다. 주요 보험사 중 하나로 꼽히는 메리츠화재도 장기인보험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현재는 장기인보험 시장에서 16~17%로 삼성화재에 이어 2위를 하는 모습이지만 지속적으로 수익성 다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장기인보험에는 질병보험·상해보험·운전자보험·어린이보험 등이 포괄된다. 최근에는 암치료에 주로 사용되는 '표적항암약물치료비' 등 신기술 치료방법과 유병자보험 등도 장기인보험에서 새로운 먹거리로 부상하는 모습이다. 또 다른 관계자는 "결국 핵심은 점차 후퇴하는 수익성에서 어떻게 새로운 먹거리를 확보할 것이냐에 달려 있다"며 "보험사들이 신계약가치를 강조하는 이유는 바꿔 말하면 새로운 수익성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피력하고 있는 셈"이라고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