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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6월 24일 Thurs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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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나의 미술을 읽는 눈

[나하나 칼럼] 미래 미술의 변화와 직업

‘미래 미술에는 어떠한 변화가 생길까.’ 우리는 인공지능과 최첨단 과학기술이 발달한 디지털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과학의 발달과 AI의 등장은 인간의 삶을 편리하고 단순하게 바꿔 놓았다. 이는 인간의 삶뿐만 아니라, 예술분야까지 그 영역을 넓혔다. 과거 미술전시가 흰 벽의 화이트 큐브에 프레임을 한 그림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전시되어 있는 모습이었다면, 현재의 전시에서는 미디어아트가 빠지지 않게 되어 어딜 가도 디지털 화면과 음향이 일반화 되어 있다. 놀라운 것은 미술관 곳곳에서 오직 인간만의 영역으로만 알려져 있던 회화를 AI가 재현한 회화와 영상이 어우려진 전시가 어색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수년 전 네덜란드에서는 유명화가 램브란트의 회화를 똑같이 재현해 낸 ‘넥스트 램브란트’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냈으며, 구글은 화가의 화풍을 입력하면 마치 그 화가의 그림인 듯 완벽히 재현해 내는 프로그램인 ‘딥 드림’을 개발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프로그램들이 재현해 놓은 작품들이 실제로 비싼 가격에 판매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예술계의 많은 화가들과 관계자들에게 불안감을 주기도 했다. 이제 더 이상 회화가 인간만의 고유 영역이 아니라 얼핏 AI가 인간의 창의적인 부분까지 대체할 수 있는 시대에 대해 고민해 볼 여지가 생긴 것이다. 게다가 2020년 전 세계를 뒤덮은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 일상의 대부분을 바꿔 버리면서 이제 직접 그림을 감상하기 위해 전시회에 가는 대신 VR이나 AR을 통한 온라인 전시를 감상하는 것을 익숙하게 만들었다. 이는 우리의 예술문화에 대한 미래를 10여년 이상 앞당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맞게 미술 관련된 직업들 또한 미래에 발맞춰 변화되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가장 먼저 미술관부터 미래형 미술관의 형태로 바뀔 것이다. 과거 회화나 조각등의 작품을 전시했던 미술관은 기존의 방식을 탈피하고 디지털과 융합기술을 기반으로 한 미래형 미술관으로 변모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따라 미술 분야에 여러 직업들이 소멸되고 새로운 직업들 또한 등장할 것이다. 먼저 AI가 미술가의 작품을 재현하는 일이 가능한 걸로 봐서 진짜 원화의 중요성이 돋보이게 될 것이다. 따라서 기존에는 없던 ‘원화가’라는 직업이 생길 수 있다. 또, 미술사와 관련되어 미술작품을 해석해 주는 미술평론가는 가상공간의 엄청난 디지털 정보를 빠르게 수집하여 해석해 주는 디지털 미술 평론가로, 미술 시장역시 디지털 아트 시장으로 변모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현재의 아트딜러나 경매사, 큐레이터라는 직업은 앞으로는 온라인 안에서 작품을 사고파는 ‘디지털 아트 딜러’나 ‘디지털 경매사’라는 직업으로 바뀔 것이며, 온라인 상의 정보를 이용하여 지금보다 좀 더 전문적인 큐레이터가 양성될 것이다. 또 지금 시대보다 더 많은 데이터와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를 더 미적으로 보완할 수 있는 ‘데이터 디자이너’라는 신생 직업도 생길 수 있다. 대신 광고 디자이너와 미술심리상담가 같은 베이스가 ‘창의성’이 기반이 된 직업들은 그대로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시대가 발전해도 아직까지는 창의성은 인간만의 고유 영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미래 미술의 변화에 알맞게 대비해야 한다. 물론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가치는 존재한다. 하지만 그 형태와 모습은 다른 방향으로 얼마든지 변모될 수 있다. 우리는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는 시대에 따라 미래의 미술에 대한 변화 역시도 반드시 인지하고 방향성을 정해야 한다. 그것이야 말로 변화되는 빠른 시대 속에서 예술의 지속성을 유지함과 더불어 미래에 올 미술사의 방향에 발맞추는 방법일 것이다.

[나하나 칼럼] 예술의 권위

‘예술은 죽었다?’ 고대 그리스 예술을 시작으로 로마네스크를 거쳐 고딕 예술과 르네상스까지 예술이 추구하는 것은 ‘완벽한 아름다움’이었다. 미의 기준이야 다르지만, 당시 기준으로 ‘완벽미’란 화폭에 얼마나 실제와 똑같이 사물을 표현하느냐에 의해 판가름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 원근법은 피렌체 학파를 중심으로 소수 엘리트만 구사할 수 있는 기술이었으니 당시 객관적 묘사를 제대로 해내기란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게 확정된 완벽미의 기준들은 16세기의 로코코 화가들에 의해 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해서 17세기 계몽주의가 주장했던 주관적 사상과 인간의 평등, 개성이 인정받는 변화가 예술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이어 18세기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은 결국 고전미술을 붕괴시켰다. 사실 그 어떤 화가가 카메라의 완벽미를 구사할 수 있겠는가. 결국 예술은 숭배의 대상이었던 신과 왕족, 귀족을 화폭에서 밀어내고 대신 대중과 자연 등의 소재를 담기 시작했다. 사실상 이때부터 예술은 더 이상 권력의 상징이 아닌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화가들은 더욱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 위해 탐구하기 시작했다. 인상주의 이후, 큐비즘, 포비즘, 모더니즘을 거쳐 팝 아트에 이르기까지 예술의 모습은 고전미술의 객관적 묘사에서 완전히 벗어나 주관적인 것에 의의를 두었으며, 내적인 표현과 창조에 중심을 두었다. 20세기에 들어와 2차 대전 이후에 니힐리즘에 빠진 예술가들은 예술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넘어서서 인간의 이성을 회의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급기야 뒤샹은 변기를 전시장에 들였고, 백남준은 피아노를 부셨다. 또 앤디워홀은 자신이 직접 그림을 그리지 않고 팩토리의 100명의 어시스트들이 실크스크린 작업을 통해 그림을 복제하듯 찍어냈다. 그들은 예술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보여 주었으며, 결국 고귀한 숭배의 대상이었던 고전예술을 난폭하게 끌어내렸다. 그러나 사실상 이러한 미술사의 과정은 ‘예술의 대중화’라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제 대중은 예술을 범할 수 있으며, 계층적 소통 대신 대중의 직접 참여가 트랜드가 되었음은 물론 AI는 딥 러닝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고흐같은 대가들의 화풍을 원화와 구분하기 힘들 정도의 작품을 구현해 낸다. 이런면에서 볼 때, 예술의 입지는 좁아졌으며, 예술가들은 그들의 자리에 위협감을 느낀다. 또, 현 시대에서 예술은 대중에게 그 중심가치인 ‘신비성’을 더 이상 보여줄 수 없다고 보고, 이제 예술은 몰락했다고 보는 비평가의 관점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들을 부정적인 관점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예술이 신비성과 우상성, 진리성을 상실하면서 대중은 예술을 비판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술에서도 진리가 사라져야 주관이 인정되고, 우상성이 사라져야 더욱 넓고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하다. 신비성의 몰락은 대중을 예술에 끌어들이며 예술의 범위를 보다 광범위하게 만든다. 이런 면에서 동시대 미술은 기존 미술에서 진화되어 정답이 없는 자유로운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예술에서 절대 진리는 소멸되었지만, 권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대중에게 있어 예술은 절대 진리에 다가가기 위한 한 방법이며, 여전히 숭배의 대상이다. 예술은 진화했을 뿐, 여전히 예술은 여전히 우리를 감동시키며 감각을 깨우고, 예술이 지향해야 바를 지향한다. 따라서 권위에 대한 불안감은 기우이며, 오히려 예술이 좀 더 예술다워지는 것을 긍정적으로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나하나 칼럼] 다원예술의 진화

2020년, 전 세계 미술계에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디지털을 매개로 많은 변화들이 일어났다. 연이어 온라인 전시가 진행되면서 놀라운 기술발전이 이뤄졌고, 덕분에 대중은 ‘가상’ 속 미술에 대한 거부감을 걷어내게 되었다. 국내의 엄격한 방역수칙은 전시관의 문을 열었으며, 더불어 두 발로 감상하는 미술에 대한 미술 애호가들의 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1년의 공백 이후, 마치 올해의 전시가 선정이라도 된 ‘다원예술’을 주제로 한 전시가 열리며, 대중을 사로잡았다는 사실이다. 다원예술이란 무엇인가? ‘다원예술’이라는 용어는 1976년 미국 시카고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이것은 ‘현대미술’이나 ‘인상주의 미술’처럼 특정 예술양식을 설명하는 용어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다원예술은 어떤 예술양식으로도 설명하기 힘들다. 다원예술은 어떤 장르에도 해당되지 않으며, 다른 예술양식이 갖는 고유의 특성도 없고, 독립된 장르마저도 초월해 버린 예술을 말한다, ‘다원예술’은 영어로 ‘Interdisciplinary Art’,로 이는 ‘학제 간 예술’, 즉 서로 다른 학문분야에 걸쳐 연구하는 ‘학제 간 접근법’을 이용한 예술로 보면 된다. 당시 늘 새로움을 갈망하던 예술가들은 예술을 매체, 기술 등과 같은 서로 다른 분야와 결합해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결과물을 탄생시켰으며, 다원예술이 예술의 울타리를 뛰어 넘은 어느 경계에도 해당되지 않는 새로운 장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즉, 다원예술은 ‘탈 장르’로 크로스 오버나 융합예술 확실히 다르다. 기존의 융합적인 형태의 예술은 기존 장르의 특성을 고유하게 보존하는데 비해 다원예술은 특유의 ‘실험적인 정신’과 ‘유동적인 면모’로 고유의 특성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중의 시각에서는 예측하기도 상상하기도 힘든 결과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게 생각하며,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예술관을 지닌 사람들은 다원예술이 기존의 융, 통합 예술과의 차별성에 대해 명확하게 정의하기 힘들다며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사실 20세기 초 마르셀 뒤샹이 <샘>이라는 작품을 내놓은 이후부터 예술의 경계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오늘날의 미술작품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기조차 힘든 작품들로 넘쳐난다. 또, 과거 미술의 정의였던 ‘미(美)’를 의도적으로 배제시킨 작품이나, 주관적 경험, 기존 작품의 차용이나 어떤 이념을 담고 있는지 알아볼 수 없는 형태의 작품들도 등장했다. 즉, 내가 바라보고 있는 모든 것들이 모두 예술작품이 된다고 해도 이상할 일이 없는 시대가 되었다. 즉 어떤 예술사조도 동등하며, 저마다 개별적 가치와 다른 상황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시각에서 봤을 때, 천의 얼굴을 가진 현 시대에 다원예술이 유행하는 것은 당연하다. 관람자 또한 단순하게 그림을 감상하는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이 주는 것들에 대해 비판적 시각으로 이해하고 통찰할 정도로 똑똑해졌다. 다만 이제는 예술이 진화할 차례다. 따라서 현재의 예술이 기존에 창작자가 중심이 되었던 것을 넘어 그 중심이 관람객으로 옮겨졌다는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제는 기존의 ‘학제 간 소통’이나 ‘실험정신의 새로움’을 존중하는 것에서 그칠 게 아니라, 이에 새롭게 창의성을 발휘해 예술의 미래에 한계가 없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현 시대가 원하는 진정한 다원예술의 모습이 아닐까.

[나하나 칼럼] 현대 미술전시의 비극

‘인증문화가 가져온 미술 전시의 비극.’ SNS(소셜 네트워크) 활동이 하나의 일상으로 자리 잡은 요즘, 미술 전시장의 예전과는 다른 어수선한 분위기가 어색하다. 곳곳에 그림보다 더 많이 설치된 포토존을 보면 그 곳이 미술 전시장인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스튜디오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다. 주로 그렇게 전시가 된 곳에는 인스타나 페이스북등을 꾸미기 위해 여기저기서 인증샷을 찍어대는 관람객들로 인해 그림을 보는데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더 기가 막힌 일은 우리가 화가의 원화라고 생각하고 감상하는 그림들이 프린트 등의 가품일 경우다. 미술 전시장에 가품이라니. 정말 기겁할 일이다. 미술 전시장에서 원화가 아닌 가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음악 콘서트에 가서 라이브가 아닌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 것과 마찬가지다. 과거부터 예술은 변화해 왔다. 따라서 예술전시회 또한 시대에 맞춰 변화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시각도 꽤 존재한다. 그러나 그 수위가 예술의 정체성을 잃는 부분이면 곤란하다. 시대가 변해도 본질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예술은 본질이 지켜질 때 정체성도 지켜지기 때문이다. 미술 전시회에 아티스트의 예술작품들 대신, 프린트와 위작들, 보기 흔한 감성문구들과 포토존이 대부분을 자치하며, 인증샷을 찍어대는 사람들과 온갖 굿즈들로 넘쳐난다면, 그 전시는 오로지 상업과 결탁한 예술로 전락할 것이다. 물론 시대에 따라 변화를 꾀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그것은 반드시 예술을 바탕으로 한 긍정적인 변화여야만 한다. 정작 대중에게 보여야 할 그림들은 뒷전인 채, 오직 트랜디한 전시를 창조해 낸다는 명목하에 시대의 변화에만 맞추는 전시가 좋은 전시일까? 현대의 전시는 시선을 끌 수 있는 미디어 전시나 3D 전시, 체험이나 사진 촬영이 중심이 된 전시가 평면회화 전시보다 많다. 물론 재미있고 쉬운 전시는 과거 특권 계층등의 소수만 예술을 누리던 이용자의 범위가 대중으로 더욱 확대되는 변화에 큰 공신 역할을 했다. 또, 늘 새로운 경험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니즈가 반영된 전시인 만큼 전시의 범위도 넓어 졌으며, 그 내용도 다채롭다. 미술관을 운영하는 입장에서도 배제할 수 없는 재정적인 부분에 대한 고민을 해결해 주기에 좋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정작 큰 단점은 요즘 전시장에서 순수하게 그림에만 관심이 있는 미술 애호가를 만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진짜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촬영이나 체험 등이 중심이 된 전시들을 반기지 않는다. 따라서 조용히 그림 자체를 감상할 수 없는 공간에 가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 그 사람들은 아예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는 전시를 선호하기도 한다. 미술 전시 기획에 있어, 늘 그 중심을 예술성에 둘지, 대중성에 둘지에 대한 부분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먼저다. 어디에 기준을 두느냐에 따라 그 전시의 가치와 평가 또한 달라진다. 기준을 대중성에 두었을 경우, 많은 관람객을 모을 수 있기 때문에 흥행에 성공할지는 몰라도 예술성에 대한 평가는 미흡하며, 그 전시의 중심이 되어야 할 미술작품들이 배경으로 전락하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반면 예술성에 초점을 두었을 경우, 전시의 질과 깊이를 추구할 수 있어 그 가치와 평가는 높을 수 있지만, 소수의 그림 애호가만 전시장을 찾아 흥행에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즉, 전시를 기획할 때에는 예술성과 대중성에 균형을 잘 맞춰야 하는데, 사실상 예술과 대중문화는 늘 맞은편에 서서 서로 줄다리기를 하는 형태라 균형을 맞추기기 쉽지 않다. 그러나 현대의 전시는 자본주의 전시답게 예술성보다는 대중성에 기준을 둔 전시가 훨씬 많다. 물론 대중성을 지향함으로 인해, 미술의 문턱이 많이 낮아졌고, 이제는 대중도 망설이지 않고 전시회를 찾을 정도로 자연스러워 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기준이 너무 대중문화에 치우쳐 있어 가끔 작가의 작품가치가 떨어지거나 고유의 회화 문화의 자리마저 좁아진 다는 것은 경계할 점이다. 예술이 대중과 격리되어 순수하게 존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하나, 상업성을 지향한 전시 문화는 상업과 예술이 손을 잡는 선을 넘어 감상자의 취향마저도 자본이 좌지우지하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전시에서 대중이 주체가 되면서 전체적인 문화수준이 높아졌다. 그러나 그에 앞서 전시의 본질은 ‘예술을 통한 세상과의 소통’이다. 즉, 전시장에서 그림과 관객은 반드시 조우해야하며, 그림이 배경으로 전락하는 것은 큰 비극이다. 시대에 변함에 따라 미술전시장도 진화한다. 그러나 ‘보는 것’, 과 ‘느끼는 것’이 빠진 미술전시가 우리에게 주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최소한 우리가 미술 전시장에 방문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갔을 때, 전시의 본질이 지켜짐과 동시에 더욱 의미 있는 경험이 되지 않을까.

[나하나 칼럼] 한국 미술의 르네상스 시대

‘한국 미술에도 르네상스가 있었을까? ‘르네상스(renaissance)’란 ‘새롭게 태어난다’는 뜻으로, 학문, 예술의 부활을 말한다. 14세기 후반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유럽 전역에 전파되어 유럽문화의 태동이 되었다. 미술에서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서 14세기에 시작되어 16세기에 정점을 이뤘다. 전 시기인 중세 1000년 동안 미술은 성당 내부를 장식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신화나 역사화가 아닌 그림들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은 과거와는 달리 인본주의나 자연의 재발견, 개인의 창조성으로 그 특징이 변화 되었으며, 나아가 과학의 차원으로까지 간주되었다. 과거 교회가 중심이 된 신화, 역사화 등의 추상적인 그림들과 조각들은 사실을 그대로 묘사하려는 자연주의 리얼리즘으로 바뀌었고, 화가들은 눈앞의 대상을 똑같이 묘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을 모방하는 예술은 이미 2000년 전 그리스 로마 시대에도 존재했던 미술이었기 때문에 이와는 다른 특별한 것이 필요했고, 예술가들은 수학, 해부학, 광학, 색채 명암등의 과학의 도움을 받아 현실을 더욱 똑같이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조각 역시 마사초나, 만테냐의 마치 통나무처럼 같이 서 있는 생명력 없는 조각들이 미켈란젤로의 조각처럼 마치 살아있는 듯 생생하게 표현되었다. 또, 거리감이 느껴지는 원근법이나 선을 흐리게 그리는 스푸마토 같은 기술로 인해 더욱 그림을 사실적으로 보이게 했다. 미술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나 ‘최후의 만찬’등이 모두 이 시대의 그림이다. 이렇듯 르네상스 운동은 교회와 신 중심의 세계관을 인본주의로 전환한 획기적인 산물이었고, 세기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는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라는 미술사의 천재들 또한 이 시기의 화가들이다. ‘그렇다면 한국미술에도 르네상스가 있었을까?’ 18세기 후반, 한국에는 ‘진경시대’가 있었다. ‘진경’은 ‘진경산수화’라 알려진 ‘참된 경치’를 뜻하는 진경을 말한다. 과거 진경시대의 화가들이 그리고자 한 것은 우리시대의 경치였다. 16세기, 조선의 회화는 독자적인 우리만의 화풍이 아니었다. 중국의 화풍을 모방해서 그 그림이 중국의 그림인지, 우리 그림인지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17세기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그 화풍도 달라졌다. 17세기 명이 청으로 교체되면서 명을 숭상하던 조선의 정체성도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그 빈틈을 조선의 문화가 대신하게 된다. 그 때부터 서서히 중국의 산수는 단절되었으며 결국 조선만의 독자적인 화풍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진경산수화’는 우리 고유의 산수다. 우리의 산수화는 양식적인 면에 치우친 중국적 화풍을 탈피하고, 조선의 기후와 지형에 맞게 바뀌었으며, 자연뿐 아니라 서민들의 삶까지 ‘진짜 경치’ 안에 포함하여 생각했다. 사실 조선의 회화라 하면 풍속화가 떠오른다. 그러나 조선 문화의 고유성은 산수화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상상속의 산수나, 서민들은 보기 힘든 중국의 산수를 그려오던 우리의 회화가, 주변의 환경이나 소박한 조선의 생활상으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은 미술사적 관점에서도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진경산수화의 선두에 있던 ‘겸재 정선’은 중국의 여산이 아닌 한국의 금강산을 그림의 소재로 <금강전도>라는 작품을 탄생시켰으며, 조선 후기의 화가인 ‘김홍도’는 양반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던 서민들의 삶을 담아 <씨름>을 탄생시켰다. 또, 풍속화가로 알려져 있는 ‘신윤복’은 서민 남녀 간의 애정이 소재인 <월야밀회>를 남겼다. 이렇게 민족의 시선으로 그림을 그렸던 화가들의 그림은 그 당시는 새로운 변화를 추구했으며, 현대까지도 한국 회화의 중심으로써 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처럼 중국이 중심이 되었던 우리의 세계관을 우리 민족에게 돌리고, 추상적인 자연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소소한 삶과 감정들까지 표현하기 시작했던 ‘진경시대’는 한국 회화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따라서 한국 예술을 우리 고유의 것이 될 수 있었던 ‘진경시대’야 말로, ‘한국의 르네상스’라 볼 수 있지 않을까.

[나하나 칼럼] 시대를 초월한 명화의 조건

하나의 그림 속에서 예술가가 추구하는 것은 다양하다. 어떤 그림은 개인의 인생철학이나 소신, 삶의 가치관을 보여주고, 어떤 그림은 예술의 궁극적 목적인 ‘미(美)’만을 추구하거나, 오로지 예술의 본질에 대해서만 탐구하는 그림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그림들 중 과거부터 현 시대에 이르기까지 ‘명화’라 불리며 꾸준히 인기가 있었던 그림들은 어떠한 공통점이 있을까. 피카소나 앤디워홀은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그 이름을 알 정도로 동시대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인기가 많은 전 세계적인 작가인데 반해, 반 고흐의 경우에는 현 시대의 가장 유명한 예술가지만 당대 사람들에게는 인정도 각광도 받지 못했던 예술가다. 이들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팝 아트의 창시자인 ‘앤디 워홀(Andy Warhol)’은 당시 ‘상업예술’을 선보이며 대중미술을 선두 지휘한 유명 아티스트다. 그는 자신의 작업실을 ‘팩토리’라고 명명하고, 자신의 작품을 만드는데 도울 어시스트 예술가 100명을 고용하여 마치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어 내듯이 기계로 작품을 찍어냈다. 그는 당시 ‘순수 예술은 고급예술이고, 상업 예술은 저급예술이다,’라는 기존의 뿌리 깊었던 논리를 깨며 세계 유명 예술가 반열에 올랐으며, 현재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자리하고 있다. 사실 앤디워홀(Andy Warhol)이 유명 아티스트로 거듭난 데에는 당시 그를 둘러싼 시대상황이 그가 추구하는 예술과 잘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던 1950년대의 미국은 제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강국이 되었고, 당시 공장에서는 대량의 상품들을 생산함과 동시에 이를 판매하기 위한 광고를 찍어내기 시작하면서 상업적인 이미지가 범람하였다. 따라서 당시 미국의 대중은 소비를 촉진하는 쾌락적 상업 이미지에 둘러싸여 있었고, 이를 잘 포착해 낸 워홀이 ‘대량미술’을 추구하며 미술에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분야인 ‘대중미술’ 창조해 냄으로써 대중이 원하는 향락적인 이미지를 제공함과 동시에 큰 인기를 끌었다고 볼 수 있다. <절규>라는 작품으로 유명해진 ‘에르바르트 뭉크(Edvard Munch)’의 경우에는 시대상이나 사회상을 포착해서 그림을 그렸다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철저히 자신의 개인사에 초점을 두며 작가만의 독특한 예술관을 표현하였다. 뭉크는 자신의 80여년의 삶 동안 무려 2만 여점이라는 엄청난 양의 그림을 그렸으며, 당시 대중에게도 큰 사랑을 받았다. 노르웨이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뭉크는 5세 때 어머니를 결핵으로, 13세 때 누나를 폐병으로 잃으며 너무 어린 나이에 가장 가까이에서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의 그림 속에는 늘 죽음의 공포에 대한 불안감이 내재되어 있으며, 이것이 곧 표현주의 방식에 의한 뭉크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창조되었다. 현재 뭉크의 작품 <절규>는 각종 대중매체를 비롯한 광고나 영화의 모티프가 될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사실 뭉크의 작품들은 철저하게 자신의 경험이나 감정에서 비롯된 개인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대중이 일상에서 겪는 공포심과 같은 보편적인 감정이기도 하여, 그 시대를 넘은 현재까지도 그의 그림은 인기가 있다. 그 공포는 시대를 떠나 현재에도 느낄 수 있는 ‘익숙함’이기에 시대를 뛰어 넘는 것이 가능했다.앞서 앤디 워홀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그림을 대중의 일부만이 즐기는 특권층의 전유물로 생각되어 있던 기존의 사고를 깨며, 대중도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그림에 대한 접근을 좀 더 용이하게 한 것이 당시 환호를 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 꼽을 수 있다. 반면, ‘빈센트 반 고흐의(Vincent van Gogh)’의 경우, 그의 살아생전 단 한 점의 작품만을 판매했을 정도로 그는 당대 사람들에게 예술가로서의 낮은 평판을 받았다. 그러나 현재는 ‘영혼의 그림’이라는 닉네임으로 전 세계의 사랑과 칭송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고흐의 그림에는 당대 영혼을 바칠 만큼의 처절하고 치열했던 그의 삶과 간절함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고흐는 당시 중산층의 평범한 가정에서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그림을 그렸으며, 그림이 팔리지 않거나 지독한 가난 앞에서도 현실에 안주하거나 적절하게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길을 고수했던 열정이 현 시대가 가진 대중의 코드와 잘 맞는다. 따라서 고흐가 당대 패배자라 인식되었을지 몰라도, 현 시대의 관점으로 그는 완전한 승리자의 입장에 있다. 사실 예술에는 시대가 지나도 변치 않는 사실과 중요한 가치가 존재한다. 그것은 하나의 예술작품이 인간의 삶에 대한 공감의 목소리를 얼마나 내는지에 대한 문제와 만난다. 한 점의 그림이 개인의 공감을 이끌어 냄과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기까지, 또 그 시대의 대중에게 부합하는 정서에 대한 사회적 동의 얻기 전까지 그 그림이 유명해지거나 명화로 거듭나는 일은 쉽지 않다.이는 곧 ‘그림을 통한 당 시대와의 소통’의 중요성을 의미하며, 그림 역시 한 사람이 완성해 낸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자 사회적 재화로도 볼 수 있다. 더불어 ‘인간 보편의 감정과 삶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충분히 끌어낼 수 있는 그림이야말로, 시대의 정신을 대변하며 명화가 될 수 있으며, 대중과 나아가 전 세계에 사랑받는 작품으로 거듭날 것은 자명한 일이라고 본다.

[나하나 칼럼] 미술사에서 비평의 대상

세계의 유명한 작품들이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다.그것은 바로 자신의 작품에 대해 비평을 받는 일이다. 비평이란 무엇인가.비평은 작품과 작가를 평가하는 기준이다. 그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다르며, 내용의 호불호를 떠나 비평의 중심에 있었던 작품은 논란 혹은 뜨거운 관심을 모으며 대중에게 알려진다. 즉, 비평은 예술가의 인지도나 명성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많은 예술가들은 유명한 비평가에게 좋은 비평을 받길 원한다. 최초의 비평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했다.그의 저서 중에 <시학>은 세계 최초의 비평 이론서에 속한다.그러나 미술에 관한 비평이 등장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 초기, 프랑스 파리의 살롱전 때부터다. ‘살롱전’이란, 루이 14세의 명에 따라 왕립미술원이 정기적으로 열었던 대규모 전시회인데, 루브르궁의 ‘살롱 카레’에서 열리게 되면서 ‘살롱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이 전시는 2,3년에 한번 씩 정기적으로 열렸으며, 미술사 최초의 근대적 형태의 전시회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살롱전은 순수 감상 목적으로서 미술 전시회로써, 신분의 저하를 떠나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전시를 보러 왔으며, 이곳에서 출품작에 대해 감상하고 느낀 것에 대해 비판적인 평가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즉, 미술 비평가가 탄생한 것이다. 미술 비평가들은 그림을 보고 주제를 표현하는 방식부터 시작해, 색의 사용이나 묘사에 대한 판단까지, 나아가 현대에 들어서는 미술작품에 대한 좋고 나쁨이나 그 가치에 대한 판단까지 글과 언어를 통해서 이를 표현해서 대중을 설득한다. 사실상 그림을 외적이나 내적으로 감상하는 미술 감상보다 깊은 사고 행위가 따른다고 할 수 있다. 더 자세히 말하면, 미술 감상은 그림이 속한 장르, 재료, 질감, 색감 등을 비롯해 무엇을 표현하려고 하였는지의 주제나 표현하고자 하는 것 등을 살펴보는 것으로, 비평에 비해 개인적인 감정이나 경험에 더 가깝다. 그러나 미술 비평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보다는 역사나 이론, 작가의 정보 등에 대한 근거를 밑받침 할 수 있는 객관적 정보를 말한다. 즉, 이 그림이 미술사에서 얼마나 가치 있는지에 대해 타인을 설득하는 ‘가치판단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미술 비평은 미술의 역사에서 그 작품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분석을 하는 활동으로서 ,철학, 사상, 논리 등이 탄탄하게 밑받침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미술작품의 가치는 무엇으로 결정이 되는 걸까. 그것은 단순하게 결정지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비평가들마다 주장도 다르고, 시대나 상황에 따라 그 가치는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가치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한편에서는 비평가에 따른 비평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비평은 그 대상인 작품의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데, 매우 큰 역할을 한다. 더불어 우리가 작품을 통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를 제시하거나, 독창성을 찾아내 논리적인 뒷받침을 해 주며, 또 미술사에서 그 작품이 어떤 자리에 위치하며 어떤 역할을 했는지 좀 더 전문적인 눈으로 작품을 바라볼 수 있게 도와준다. 따라서 비평의 과정은 미술사에 남아 있게 될 작품들이 걸러낸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비평의 역사에 있어 높은 가치평가를 받은 유명 작품들의 공통점이 궁금해지는데, 그것은 바로 ‘뛰어난 독창성’이다. 바로 이 전무후무한 ‘독창성’이 바로 비평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가들은 이를 찾기 위해 끈임 없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감상자는 단순한 감상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감상의 대상에서 독창성을 찾아내는 비평가의 역할을 해 보는 것은 어떨까.

[나하나 칼럼] 20세기의 이후의 미술

나하나 인드라망 아트 컴퍼니 대표 현대미술은 더 이상의 기법도, 장르도, 재현도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미술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이다.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컨템포러리 아트라 불리는 현대미술. 그 개념은 어떻게 생긴 걸까? 화가들의 두드러진 개성 표현. 이는 인상주의가 표방한 방식이다. 하지만 이에 반발하여 혁신운동을 일으키는 미술가들이 등장하였고, 그 다음으로는 <야수주의>가 나타났다. 야수주의는 포비즘 이라고도 불리우며 모더니즘 예술에 있어 잠시 나타났었던 미술 사조다. 야수주의 파 화가들은 다양한 주제를 원색의 강렬하거나 충격적인 색채를 이용해 그림을 그렸는데, 그 형태나 원근법을 왜곡하였다. 야수주의는 이지적인 느낌의 입체주의와는 달리, 눈에 보이는 색채가 아닌 마음에서 느껴지는 색채를 표현했기 때문에 이를 독일의 표현주의의 한 형태로도 보았다. 대표화가로는 앙리 마티스가 있다. 한편, 같은 시기 독일에서는 표현주의가 등장하였다. 이들 역시 야수주의와 마찬가지로 강렬한 색채와 단순함, 그리고 긴박한 구도를 사용하여 작가의 내면을 극단적으로 표현하였다. 대표화가는 에드바르트 뭉크가 있다. 표현주의 다음으로는 입체주의, 즉 큐비즘이 나타났다. 입체주의는 후기 인상주의 화가인 세잔의 영향을 받았으며, 자연이나 역사 등을 원통, 원기둥 등의 입체적인 표현을 하였고, 다각도에서 본 대상을 화폭에 담았다. 이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입체주의 전까지 존재해 왔던 고전적인 원근법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혁신적인 시도라 할 수 있으며, 사실상 입체주의의 대표화가였던 파블로 피카소가 바로 현대미술로의 지름길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후에도 현대미술은 짧은 시간동안 수많은 사조들이 나타나고 사라졌다. 제 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자신의 감정을 점, 선, 면 등으로 표현하는 추상주의가 나타났으며, 인간의 계몽과 과학의 발전이 전쟁의 폐해로 나타났다는 사실에 허탈함을 느꼈던 화가들에 의해서 다다이즘 운동이 전개되면서 다다이즘 미술사조가 나타났다. 또, 초현실주의는 제 1차, 2차 세계대전 사이에 등장했는데, 초현실주의의 특징이 불합리하고 불가사의한 꿈의 세계를 화폭에 그렸던 부분으로 봐서 전쟁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이 예술을 통해 드러난 부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그 시기가 많은 유럽의 예술가들이 미국으로 도피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나타났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심리적 불안감을 물감을 뿌리고, 붓을 휘두르며 작품으로 표현하였고 그것이 곧 초현실주의 작품이 된 것이다. 팝 아트는 대중문화의 발달로 인해 생긴 미술사조로 대표화가로는 앤디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제프쿤스 등이 있으며, 현재 이들의 작품은 전 세계 미술시장에서 높은 작품가를 호가하며 큰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미술을 죽었다며 화가의 아이디어가 곧 미술이라는 개념미술과 현대미술이라 불리는 포스트모더니즘, 현재 동시대미술이라 불리는 컨템포리리 아트가 모두 현대미술에 속한다. 사실 현대미술에서는 이전 미술사조에서 볼 수 있었던 룰은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다. 따라서 감상자가 미술관을 찾았을 때, 작품만을 보고 작가의 의도를 짐작해 내기란 쉽지 않은일이 되었다. 하지만 화가의 본질은 세상과 소통하고 대중과 소통하는 것이며, 모든 아티스트들이 그것을 원한다. 결국 현대미술에는 늘 작가의 설명이 따른다. 현대미술은 어느 순간, 난해한 것이 되어 버렸으며, 마치 과거와는 상관없는 것처럼만 느껴진다. 그러나 과거를 부정하고 새로운 역사가 쓰여질 수 없듯이, 그냥 현대미술이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현대미술 역시 과거 미술의 재현인 것이다. 사실 지금도 전 세계의 수많은 미술애호가들은 유럽으로 발길을 향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건 과거를 그리워하는 부분이 본능적으로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즉, 유럽이 바로 미술의 발생지이기 때문이다. 현재 미술시장은 현대미술에서 멈춰 서 있다. 또 어떤 평론가들은 미술에 있어 더 이상 나올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틀렸다. 원시시대부터 미술이 존재했듯이, 반드시 미술의 미래도 존재하며, 다음에 올 것은 무엇일까 기대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나하나 칼럼] 후기 인상주의

나하나 인드라망 아트 컴퍼니 대표 "공통점이 없는 것이 공통점이 된 미술사조" 화가가 각자의 개성 있는 화풍을 추구했던 <후기 인상주의>를 정리한 말이다.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조르주 쇠라, 폴 세잔, 조르주 로트랙 등' 이들은 인상주의에 대한 불만으로 후기 인상주의 라는 새로운 사조를 탄생 시킨 화가들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빛을 화폭에 담기 위해, 순간의 느낌을 빠른 포착해 그림을 그렸다. 따라서 구도나 형태, 색채에서 부족함이 나타남은 당연했다. 바로 이 같은 점을 비판하며 나타난 화가들이 바로 후기 인상파 화가들이다. 후기 인상파 화가들은 앞서 인상주의 화가들과는 다르게 과학적인 방법으로 색채를 연구하고 이를 화폭에 담았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조르주 쇠라의 점묘법이다. 조르주 쇠라의 그림은 너무 독특하고 개성이 있어서 누구라도 한 눈에 알아볼 정도다. 이는 바로 점묘법으로 채색을 했기 때문인데, 점묘법은 노랑과 빨강의 점을 화면 전체에 찍어 채색을 하는 방법으로 멀리서 봤을 때, 주황색으로 보이는 과학적인 이론을 도입해 완성한 작품이다. 반 고흐 역시 객관적인 인상을 표현한 인상주의 화가들과는 달리 회오리 물결이 치는 듯한 느낌의 채색으로 주관적인 감정을 표현하였다. 조르주 로트랙의 작품은 현대판 포스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간결한 색채 표현으로 현대적인 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훗날 현대미술에서 포스터로 발전한다. 사실 후기 인상주의에서 가장 눈여겨 볼 화가는 폴 세잔이다. 그는 평생을 그림에 대한 연구를 하다 생을 마무리한 작가다. 그는 당시 미쳤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림 연구를 했으며 소신이 확실한 화가였다. 그는 생 빅투아르 산을 무려 서른 번 이상을 그렸으며, 백여 번 이상을 갔다고 한다. 세잔은 완벽한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으며, 대상에 대한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며칠이고 대상을 관찰했고 하물며 사과가 다 썩은 적도 있다고 하니 그림에 대한 그의 소신이 어떠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이 같은 세잔의 집요한 시도들은 결국 피카소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큐비즘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후기 인상주의 작가들은 당대에는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고흐는 살아생전 단 한 점의 그림만을 판매 하였으며, 지독한 가난 속에서 결국 자살로 생을 마무리 하는 안타까운 삶을 살았다. 또, 고갱 역시 가난하고 외로운 말년을 보내다 생을 마무리 하는 등 힘든 삶을 산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이야 말로, 화가 개개인이 개성 있는 자신의 화풍을 만들어 냈으며, 그 안에 주관적 감정과 자기 자신의 내면표현을 캔버스에 담았다는 점에서 현대미술로 가는 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나하나 칼럼] 인상주의 미술

나하나 인드라망 아트 컴퍼니 대표 '빛을 그림으로 그린 화가들' 인상주의 미술 이전의 화가들은 대상을 어떻게 하면 똑같이 그릴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에 늘 시달렸다. 그들은 초상화나 정물화를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묘사하려고 하였으며, 그들의 작품은 매우 아카데미 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카메라의 발명은 더 이상 화가들이 대상과 최대한 비슷하게 묘사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상실시킨다. 사람들은 더 이상 초상화를 그리지 않게 되었으며, 실업난에 빠진 많은 화가들은 삶을 영위하는 방법의 한 편으로도 다른 영역을 구축해야만 했다. 사실 모든 미술사조가 역사적 상황의 극에서 탄생했듯이 인상주의 역시 실제적인 묘사에서 추상적인 영역으로 눈을 돌리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러 탄생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동안 실내에서 그림을 그렸던 화가들은 그들의 아틀리에를 벗어나 야외로 나가게 된다. 사실 19세기는 프랑스 혁명이 함께 했던 격동적인 시기다. 이 큰 변화와 함께 마치 예술이란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화가들 또한 그림을 밖에서 그린다.는 큰 변화를 맞게 된 것이다. 물론 이는 큰 혁신을 가져온다. 당시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돼지 방광에 물감을 휴대했었던 것이 현재 사용하는 간편한 튜브 물감이 되었으며, 이는 산업혁명과 함께 예술사에 있어서도 큰 발전이기도 하다, 또한 기차의 발명으로 화가들은 더욱 먼 거리에 나가서 풍경을 그리는 일 또한 가능해져서, 그들을 태양이 주는 직사광선의 진동하거나 시시각각 변화되는 풍경들의 순간적 양상을 표현해 내게 된다. 사실 빛의 변화에 따라 보여지는 풍경들은 굉장히 유동적일 뿐만 아니라, 같은 풍경이라도 변화무쌍하며 매우 다른 뉘앙스를 가진다. 그들은 그렇게 자연의 표정을 파악하며, 그 이전에 지향했던 객관적 범위를 넘어 그 자신들의 주관적인 감각을 반영한 그들만의 새로운 기법을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인상주의 란 말은 언제부터 사용된 것일까? 1974년 나달의 사진관에서 제 1회 화가, 조각가, 판화가, 무명예술가의 전시를 열게 되었는데, 그때 바로 인상주의 미술의 대표화가인 모네의 작품 '인상, 일출'이 출품된다. 이 때 루르아라는 한 기자가 이 작품의 제목을 그대로 모방해 인상파 출품전이란 제목으로 신문기사를 쓰게 되면서 인상주의 란 말이 현재까지도 쓰이고 있다. 맨 처음 인상파가 설립된 건 마네를 중심으로 한 청년화가들에 의해 1980년대 파리에서 결성 되었는데, 이들은 기존의 아카데믹한 작품들에 많은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현재 루브르에서 가장 인기있는 작품들인 '풀밭위의 점심식사', '올랭피아'등의 작품을 1863년 낙선화전에 출품해 크게 혹평을 사며, 인상주의의 지평을 열었다. 사실 인상주의 미술은 근대적 감각에 의한 감성의 해방운동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반아카데미 사상을 넘어 후기에 가서는 그들의 작품을 더욱 견고하게 다져 나가기를 원했으며, 빛의 영역을 추구함과 동시에 자유로운 관찰과 기법으로 그들 각자의 개성을 주관적으로 추구했다. 또 그들 작품의 내용이나 형식면에서도 자유분방함을 추구해 각자가 모두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인상주의 대표화가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마네, 모네, 르누아르, 드가, 들라크루아, 시냐크 등의 많은 화가들이 있어 그 작품을 설명하기에는 끝이 없을 정도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은 경험을 토대로 색채원리를 파악, 연구, 분석하였으며, 이를 체계화 했다는 것이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인상주의 화가들이 고전미술과 현대미술의 분기점에 서서 서양미술이 수 세기동안 지켜왔던 원근법이나 입체감등을 과감하게 버리고, 현대미술로 나아가는 분기점이 되었다는 데에서 혁신주의 화가들라는 또 다른 이름을 주고 싶다.

[나하나 칼럼] 사실주의 미술

나하나 인드라망 아트 컴퍼니 대표 망막에 비치지 않는 것은 그리지 말라. 사실주의의 아버지 쿠르베의 말이자, 사실주의의 정의다. 사실주의는 낭만주의에 대한 정신을 반대 표명함과 동시에 리얼리즘을 표방하면서 나타난 19C 중반에 나타난 미술 사조다. 당시 화가들은 자신이 속하던 시대의 풍속이나 관념과 같은 사회 실상 등의 동시대에 나타나고 있었던 가혹한 현실들을 사회비판적 관점으로 캔버스에 표현하였다. 리얼리즘이 현실의 주제를 이상화 시키거나 극적인 부분을 뽑아 표현했다면, 사실주의는 리얼리즘의 미적 표현을 철저하게 배제시킨다. 즉, 사실주의란 있는 그대로를 수정 없이 캔버스에 옮기는 것을 말한다. 19세기 초 프랑스 혁명(1789~1799)과 나폴레옹의 제 1제정으로 아카데미나 살롱등이 폐쇄 되었다. 많은 작가들은 국외로 망명 하였으며 그로 인해 문단 및 예술계의 피해는 매우컸다. 또 특정 계층에 한정되었던 문단의 독자층이 서민계층으로 확산됨에 따라 신문과 웅변이 유행하였다. 이는 사회적, 정치적 부조리가 부각되었음을 나타낸다. 그 당시 사실주의의 아버지라 불렸던 구스타프 쿠르베는 역사나 시적인 주제들을 다루는 보수적인 취향에 반대하는 실용주의를 신봉하고 있었는데, 그는 회화는 구체적인 예술임과 동시에 반드시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에만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천사를 그려 달라는 주문에 나는 천사를 본 적이 없다. 나에게 천사를 보여주면 천사를 그려주겠다. 라고 말한 일화는 오로지 실재하는 것만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렸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또 역사화에 어울리는 거의 7미터에 가까운 대형 캔버스에 황량한 잿빛 색조의 시골 장례식장의 그림을 그리고 농부들이 등장한 것에 대해 당시의 비평가들은 이를 절망적일 정도로 비천하다고 표현했다고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현재에도 쿠르베의 유명 작품으로 알려진 <내 화실의 내부>는 1955년 열린 파리 박람회에서 심사위원들에 의해 전시를 거부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박람회장 바로 맞은편에 전시관을 만들어 사실주의라는 이름으로 개인 전시를 진행하였는데, 이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개인전이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주의는 풍경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작은 마을인 바르비종에서 모여 풍경화를 그리는 집단인 바르비종 파가 등장하였고, 그들은 캔버스와 이젤을 들고 야외로 나가 풍경을 그렸다. 바르비종의 대표적인 화가는 바로 만종으로 유명한 장 프랑수아 밀레와 안개 낀 나무를 그린 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다. 밀레는 씨를 뿌리고 거두며 일하는 농부들의 모습을 주로 그렸으며, 그들의 일을 숭고하게 표현하였다. 코로는 자연스럽고 객관적인스타일의 풍경화를 그렸는데, 특정한 순간에 특정한 장소의 표현을 많이 하였다. 특히 그는 후기에 단색조의 풍경화를 그렸는데, 그 인기가 엄청나서 코로의 그림은 3천 점인데, 그 중 6천점은 미국에 있다.는 말이 돌 정도로 모조작이 많은 화가로도 알려져 있다. 사실주의는 미국에도 등장하였다. 대중잡지의 삽화가로 큰 성공을 거둔 윈슬러 호머는 유럽의 미술작품과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작품을 만들어 냈으며, 해부학적 회화로 유명한 에킨스는 자신이 직접 시체를 해부해 보는 경험을 통해 견고하고 어려운 작업들을 소화시켰다. 그는 훗날 의과대학은 물론이며, 펜실베니아의 한 아카데미의 원장을 하면서 혁신적인 미술교육법을 실시하는 등의 시대를 앞서가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여자들과 흑인들에게도 미술을 권했는데, 그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헨리 테너는 사상 처음으로 주목받는 흑인 화가가 되었다. 또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슬로건으로 유명한 제임스 아보트 맥닐 휘슬러는 19C 가장 논란을 일으킨 화가로 손꼽힌다. 그는 회화란 어떤 주제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묘사된 것 자체가 주제. 라는 개념으로 서구 미술계의 방향을 바꾸어 놓은 현대 추상화의 선구자다. 또 유명한 작품 스트룩스 부처상을 그린 존 싱어 서전트 역시 카메라가 대중화되기 이전의 마지막 초상화가로써 미술사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화가다. 그의 스승은 벨라스케스로 그 역시 사실적인 감각으로 상류층의 초상화를 세련되고 탁월하게 표현하여 미국과 유럽에서 명성을 날렸다. 사실 우리 인류의 역사에 있어 사실주의는 꾸준히 있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과거 고대 그리스의 사실주의는 이상화 된 사실주의였고, 헬레니즘 시대에는 자연주의식 사실주의가, 로마시대에는 살아생전의 그대로를 표현한 사실주의가 나타났으며, 르네상스 시대에는 이상화 된 사실주의로 표현되었다. 바로크 시대에는 이상주의와는 상대적인 드라마틱한 사실주의가 나타났으며, 19세기에 들어서야 이상과 관념이 완전히 배제된 눈에 보이는 현실적이고 실재적인 사실주의가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사실주의라 할 수 있을까. 사실주의는 필연적으로 사회성, 정치성의 성격을 띤다고 본다. 비판적 리얼리즘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역시 특정한 정치적 경향이 있다. 그것은 현 시대의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함과 동시에 결국 그 시대가 나아갈 방향성과 일치한다. 결국 사실주의란 우리 삶의 정체성이 담긴 미술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나하나 칼럼] 낭만주의 미술

나하나 인드라망 아트 컴퍼니 대표 뜨거운 가슴으로 자신의 감수성을 표현했던 화가들. 18세기는 피아노의 신이라 불리우는 프레데릭 쇼팽이 활동했던 시기다. 낭만주의 작곡가의 쇼팽은 사는 동안 멋을 즐기며 그만의 자유로움으로 수많은 피아노곡을 만들었다. 바로 이 쇼팽의 초상화를 그려 준 이가 있는데, 그가 바로 프랑스 낭만주의의 대표화가인 외젠 들라크루아 다. 그들은 강렬하고 자유로운 삶을 원했다. 느낌은 모든 것이다라고 괴테가 말했다. 이는 낭만주의의 정의기도 하다. 낭만주의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신고전주의를 반발하며 일어난 미술 사조다. 그들은 이성보다는 감성과 직관에 따른 작품 활동을 하였으며, 예술가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내적인 부분까지도 표현해 내야 한다. 는 것이 바로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 당시에는 중세풍의 흑마술과 같은 신비한 이야기들이 유행하였고, 바로 이러한 것들이 당시 화가들의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이들은 낭만주의 화가답게 색채표현 또한 자유롭고 다채롭게 사용하였으며, 자신이 느낀 감정을 제한을 두지 않고 화폭에 있는 그대로 표현하였다.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제리코는 메두사 호의 뗏목 이라는 작품을 통해 낭만주의 시대를 열었는데, 그는 그림을 생생하게 그리기 위해 마치 자신이 기자처럼 이 비극적 사건을 취재하였고, 일일이 생존자들을 만나 체험담을 들었으며, 그 장면들을 표현하기 위해 시체를 스케치하고 광인들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렇게 제리코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 주제는 작품으로 표현되었고, 이는 살롱전에 출품되며 사람들에게 매우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사실상 이 그림이 충격을 준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존재한다. 무시무시한 주제의 선정이나 생생하고 자세한 그림의 묘사가 아니라, 바로 정부의 무능력을 비판하는 정치적 의미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당시 낭만주의의 열정이 당대 사회를 인식하고 고발하는데 쓰여진 것이다. 이를 시점으로 낭만주의는 본격적으로 지성보다는 감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으며, 후에 들라크루아에 의해 키오스 섬의 학살 등과 같은 작품들도 등장하였다. 이 시대는 또한 사회적 변동이 심했던 혁명의 시기다. 먼저 산업혁명이 일어났으며, 미국의 독립과 나폴레옹의 전쟁으로 영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영국 국민들은 정치적 각성을 요구하였고 바로 이것들이 영국 낭만주의 미술의 배경이 되었다. 영국의 화가들 역시 개인 자신의 표현을 중요시 하였으며, 영국초기 낭만주의를 선도한 윌리엄 블레이크는 거대한 용과 싸우는 태양의 옷을 두른 여인이라는 작품을 통해 낭만주의적 주제, 색체, 감성 등을 모두 표현하였다. 또, 터너는 감성에 호소하는 빛과 색채를 도입하여 터너식 낭만주의 화풍을 만들어 냈으며, 색채로써 존재를 표현한 낭만주의 화가라는 수식어를 달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자연과 인간이 낭만주의 회화의 주제로 나란히 자리 잡았다. 물론 이 주제 역시 모두 현실과는 멀게 미화된 낭만주의 형식으로 표현되었으며, 이 때 미국만의 독자적인 유파들이 처음으로 탄생하였다. 이는 미국인들에게 자연이란 존재가 유럽과는 다르게 장대하고 거대하며 경이롭고 숭배, 개척해야 할 커다란 존재였으며, 바로 이러한 풍경에 관한 느낌을 담은 그림들에서 낭만적 사실주의라는 새로운 미술양식을 만들어 진 것이다. 또한 미국의 독립과 함께 꿈을 이루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그린 풍속화도 19세기 초부터 중요한 장르가 되어서 미국만의 낭만주의 스타일로 표현된다. 사실상 미술사에 있어서 어떤 사조에 대해 한마디로 정리를 하거나 용어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프랑스 낭만주의의 대표 화가로 불리우는 외젠 들라크루아는 자신을 신고전주의 화가라 생각하였으며, 그 당시의 유명한 예술가들이 낭만주의에 반대 했다고 하니 이는 어쩌면 우리가 만든 분류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낭만주의 미술사조는 진보적이라는 속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사고에 집중되었던 예술의 탐구가 인간의 내면과 감성에 초점을 두고 미술의 탐구 영역을 광범위하게 넓혀 준 것이다. 낭만주의는 근대를 넘어서 현대를 관통한다. 또한 현대적 인문정신의 심층에도 존재한다. 우리는 여전히 낭만주의에 매력을 느끼며 산다. 그 이유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나하나 칼럼] 신고전주의 미술

나하나 인드라망 아트 컴퍼니 대표 정확성을 중시하는 합리주의 미술 신고전주의란, 18C 말 귀족중심의 로코코 문화가 향락적이고 퇴폐적이며 무의미한 가치의 미술로 치부되면서 발전한 미술양식이다. 신고전주의는 고전, 즉 로마와 그리스의 문화를 추구하는 것을 말하며, 앞에 신고전주의라 명명한 것은 이미 앞서 고전주의로 돌아가자는 르네상스 운동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사실상 로코코의 향락적 문화는 고전의 아름다움을 더욱 신선하게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그 당시 폼페이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그곳에서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품과 문화재가 대거 쏟아져 나오면서 사람들의 관심과 열정은 더욱 고전예술을 향하였다. 가장 먼저 역사화가 등장하였는데, 이에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신고전주의의 대표화가로 불리우는 다비드다. 다비드는 고대 로마 여신들을 바탕으로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라는 작품을 표현해 냈으며,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소크라테스의 죽음 역시 모두 고전에 바탕을 둔 작품으로 현재까지 높게 평가되고 있는 신고전주의 대표작품이다. 또한 당시 귀족들 사이에서는 초상화의 배경을 고전주의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것으로 하는 풍조를 유행이었으며, 로마와 그리스의 예술품들을 수집하였다. 신고전주의의 미술 양식의 특징은 붓자국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색채가 아닌 선을 중시하였음을 나타내며 따라서 작품의 느낌 또한 매우 이성적이었다. 화면 구성은 로코코에서 자주 사용되던 사선구성을 피했으며, 구성은 매끈하고 심플한 구성을 선택하였다. 이는 한 세기 전의 푸생의 고전주의와는 분명히 다른 양식인데, 조금 더 자연스럽고 순수하며, 불규칙한 곡선의 사용을 피하고 직선과 비례를 중시함으로써 이성적인 느낌을 좀 더 느낄 수 있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다비드 이후에 신고전주의의 대가라 불리우는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가 대두 되었는데, 앵그르는 다비드의 수제자로써 스승보다 더 고전에 충실한 화가로써 보수주의의 대변인인의 역할을 하였다. 그는 낭만주의파와의 싸움도 서슴치 않았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때때로 자신의 규율에서 벗어나 복잡다난한 선을 사용함으로써 훗날 피카소, 마티스, 드가등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당시 미국을 살펴보면 바로 이 시기에 독립이 이루어 졌다. 따라서 당시에 지어진 워싱턴의 공공건물은 사실상 모두 신고전주의 양식을 품고 있다. 이는 버지니아 대학을 세운 건축가 토머스 제퍼슨의 역할이 컸다고도 볼 수 있다. 또, 조각 부분에 있어서도 신고전주의 스타일이 유행하였는데, 히렘 파워스라는 작가는 그리스 노예라는 작품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벤자민 웨스트는 전쟁화를 그려 미국 태생으로써는 처음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처럼 신고전주의는 19C 유럽을 휩쓸며 미국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사실 미술에 있어 사람들은 화려하고 강렬한 것에 끌리는 매력이 있다. 하지만 합리적이고 사실적인 표현과 균형미, 세월이 지나도 질리지 않는 섬세함과 천재적인 소묘력 등은 오히려 기억에 더 오랫동안 머물기도 한다. 바로 신고전주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미학적 배경이야 말로 바로 이러한 표상을 선도하는 미술양식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끝>

[나하나 칼럼] 로코코 미술

나하나 인드라망 아트 컴퍼니 대표 '매우 여성적이며 귀족적이 미술' 로코코 미술은 18세기 초 프랑스의 귀족층을 중심으로 발전한 미술 양식이다. 이집트 파라오 이후 가장 강력한 왕권을 누린 루이 14세가 세상을 떠난 후 귀족들은 자유를 누리게 되었고, 베르사이유 궁이 파리로 옮기는 틈을 타 이들 또한 궁전을 나와 자신의 저택을 꾸미게 되었다. 이 때 많은 미술품들이 필요하였는데, 바로 여기에서 발전된 양식이 로코코 양식이다. 로코코 란 조개껍데기의 장식과 더불어 당시 유행이던 인조동굴의 두 단어에서 파생한 말로, 바로크와 신고전주의 사조 사이에 끼인 과도기적 특성을 지닌 미술 양식이다. 흔히 로코코 미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매우 화려하다. 이유는 실제로 로코코 미술의 가장 큰 특징은 장식성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 로코코 시대는 루이 14세의 죽음과 함께 그 동안 억눌려 있던 것들이 사라지고 프랑스인 특유의 민족성인 자유와 기쁨이 가장 충만했던 시기다. 따라서 베르사이유 궁을 나온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영향력을 마음껏 행사하고 싶어 했으며, 이는 그들의 새 저택을 꾸밀 미술품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들은 집을 꾸미는 것에 열중하였으며, 지성과 부를 갖춘 상류 시민계층이 예술 애호가를 자처하며, 미술비평, 연구, 수집을 하였다. 따라서 당시에 갤러리의 발전 또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로코코는 살롱문화를 발전 시켰다. 귀족 부인들은 자신이 꾸민 저택들을 자랑하고 싶어 했으며,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해 사교모임을 갖게 되었다. 이에 초대받은 귀족들은 문화, 예술, 과학, 정치 등을 주제로 세련된 대화모임을 가졌으며 이가 곧 18C의 살롱문화로 발전했다. 살롱문화의 시초를 연 사람은 카트린느 비본이였다. 하지만 이를 본격적으로 발전시킨 사람은 루이 15세의 애첩으로도 유명한 마담 퐁파두르였다. 당시 마담 퐁파두르가 계몽주의 철학자들을 지지하고 보수주의 가톨릭과 왕당파가 금서로 규정한 백과전서를 출판하도록 도왔다는 기록은 매우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프랑수아 부셰나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등의 유명화가들을 후원하기도 하는 등 예술을 활성화 시켰으며 귀족사회의 생활을 미화하며 유럽을 휩쓸었다. 처음 프랑스 파리에서 태동한 로코코 미술 양식은 이를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의 궁정문화까지도 확산시켜 영향을 준 상류사회의 대표 미술 양식이었지만, 결국 비현실적이고 퇴폐적이라 여기는 반로코코적인 움직임에 의해 결국 프랑스 혁명 이후로 쇠퇴한다. 하지만 현대까지도 로코코 양식은 가구나 실내 건축 인테리어 뿐 아니라, 의복이나 생필품에서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로코코 양식의 고유성과 독자성으로 확실히 자리매김 한 부분은 미술사에 있어서도 높게 평가해야 함은 분명하다.

[나하나 칼럼] 바로크 미술

나하나 인드라망 아트 컴퍼니 대표 풍부한 색채와 동적인 표현. 바로크란 말은 비뚤어진 진주를 가리키는 포르투갈의 단어에서 유래된 말로 불규칙을 나타낸다. 그러나 당시 이 말은 장식이 지나친, 변덕스러운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이 시기의 미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폄하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바로크 미술은 17세기 유럽의 시대정신과 부합하는 외향적이고 격동적인 경향을 선보인 미술이다. 종교 개혁을 반대하며 교황 권력의 부흥을 목적으로 발달한 미술양식이었으며, 처음에는 르네상스 미술에 대한 모멸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19세기 중반에 독일의 미술사가들에 의해 부정적인 의미는 소멸되었다. 바로크 미술 양식은 종교 미술에 새로움을 제시 하였다. 르네상스 미술에 비해 동적이며 풍부한 색채를 사용하였고, 뚜렷한 명암 대비를 제시 하였다. 즉, 르네상스의 고전적인 양식에 동적이고 감성적인 스타일이 더해졌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 시기에 렘브란트와 벨라스케스 같은 천재화가가 배출 되었으며, 더럽고 추한 모습까지 있는 그대로 사실적인 묘사를 즐겼던 카라바조와 조각가 베르니니, 건축가 보로미니 등이 모두 이 시기의 예술가들에 속한다. 대표적인 바로크 양식의 예로는 프랑스 파리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들 수 있으며, 전체에 종속되는 부분들의 조화를 통한 균형을 강조함으로써 르네상스 미술의 균형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을 느낄 수 있다. 바로크 미술이 추구하는 화합은 형식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차원을 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신체를 참여하고 그림으로 하여금 정신을 참여 시키는 미술이라 볼 수 있다. 건축에서는 거대한 양식의 표현과 곡선의 활용, 자유롭고 유연한 접합부분등을 특색 있게 나타내었고, 조각에서는 다양한 의복의 디테일한 표현과 동적인 자태를 역동적으로 나타내었다. 또한 회화에 있어서는 대각선 구도, 원근법, 단축법, 눈속임 효과 등을 다양한 표현들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다. 바로크는 감성을 보여주는 미술이나 감성의 표현이라기보다는 감성의 해방에 가깝다. 특히 인간의 감성을 대변해 주는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바로크 미술은 르네상스 미술의 진보도 타락도 아니다. 물론 혹자는 바로크 미술을 르네상스 고전주의의 퇴폐현상으로 보는 시선들도 있지만, 이는 또 하나의 새로운 이질적인 양식인 것이며, 근대 미술의 또 다른 정점이라 볼 수 있다. 또한 바로크 양식, 바로크 감성. 바로크 의식.등의 용어들은 단순히 시대적 개념이 아닌 일반적인 문화현상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사실상 바로크 미술은 미술사에 있어서 가장 화려한 시기였다. 또한 다른 미술 양식들이 일반적인 원리의 규칙을 찾아 표현해 냈다면, 바로크 미술은 인간의 감성을 대변하는 가장 정확한 양식이며, 종교에 한정되었던 미술을 일상에 뿌리 내림과 동시에 일반적인 문화현상으로써 현대까지 이어졌다는데 큰 의의를 두어야 할 것이다.

[나하나 칼럼] 르네상스 미술 -②

나하나 인드라망 아트 컴퍼니 대표 사실주의의 극치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이 고전주의에서 시작한 미술이라면,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은 자연의 세부 묘사와 있는 그대로 사물을 묘사하려는 사실적인 기법에서 시작한 미술이다. 이 시기에는 초상화가 두드러졌는데, 그 기법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프랑스의 왕 샤를 6세가 자신의 신붓감을 물색하는 과정에서 화가를 보내 초상화를 그려오게 하여 결정했다는 에피소드마저 전해진다. 당시 작품 중 유화의 발명자인 얀 반 에이크의 그림 붉은 터번을 두른 사나이를 보면, 인물 속 얼굴의 수염 구멍까지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여 사실주의의 극치를 보여 주는 등 당시 사실주의 묘사와 유화기법이 유행하였음을 충분히 가늠케 한다. 또한 모델이 관찰자를 바라보는 첫 번째 초상화가 제작된 시기이기도 하며,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이라는 작품을 통해 작품 속 거울위에 얀 반 에이크가 여기 있다.라는 문구를 써 놓음으로서 그림이 실제로 결혼식을 증명하는 서약서 역할을 하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는 쾌락의 정원이라는 작품을 통해 쾌락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한 풍자화를 그려 초현실주의 선구자라는 불리 우는 이유를 증명하였으며, 피테르 브뢰헬은 보스의 허무주의와 풍자주의의 영향을 받아 축하객들이 게걸스럽게 먹고 마시는 일에 몰두하는 장면을 그린 농촌의 결혼식이라는 유명한 풍속화를 미술의 한 장르로 승격시켰다. 한편 이 시기에 독일에서는 그뤼네발트의 종교화, 홀바인의 초상화, 뒤러의 판화가 등장하였다. 당시 종교개혁으로 화가들의 일거리가 떨어져 힘들었던 시기에 홀바인은 영국으로 건너가 에라스무스의 추천으로 헨리 8세의 궁정화가가 되었으며, 헨리 8세의 초상화를 그렸다. 또 그는 프랑스 대사들이란 작품에서 선, 질감, 원근법 및 탁월한 색채를 보여 줌과 동시에, 정확한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놀라운 테크닉을 구사하였다. 그는 결국 나아가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장르인 초상화의 기준을 정립하는 위대한 업적마저 이루었다. 북유럽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 불리던 뒤러 는 남유럽의 발견들을 북유럽에 전파하였다. 그는 원근법과 이상적이 비례에 관한 책을 펴냈으며, 수많은 자화상을 남긴 첫 번째 화가다. 또한 그는 판화작품을 통해 명성을 날리게 되었는데, 판화의 가장 오래된 목판화에 동판화의 해칭 기법을 적용하여 명암의 효과를 극적으로 표현하였다. 뒤러는 직선과 곡선, 크로스 해킹기법을 사용하였고, 빽빽한 선을 이용해 유화 못지않은 세밀한 질감과 색조를 보여 주었다. 또, 순수하게 풍경만을 그린 알트도르퍼, 교회와 성서의 진리를 표현한 그뤼네발트 등도 당시 독일의 화가들이다. 하지만 모든면에는 양면성이 존재하듯 당시 르네상스 양식들도 지나치게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화가들의 욕망에 의해 기교가 중심이 된 후기 르네상스 시대를 맞는다. 지나치게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려던 그들의 욕망은 자연의 관찰에 기초한 사실주의 양식을 저버리고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과장하거나 귀족적인 우아함을 추구하는 양식으로 변모한다. 이를 마니에리즘이라 하는데, 결국 당시 작품들에서 불안정함과 불균형, 혼란스럽고 극적인 구성이 나타나게 된다. 이는 종교개혁으로 교황의 권위가 실추되는 불안정하던 시대를 반영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는데, 긴 목의 마돈나를 그린 파르미자니노, 반종교개혁과 종교재판의 광기에 휩싸여 활동한 엘 그레코의 요한 묵시록의 다섯 번째 봉인의 개봉이라는 작품등을 통해서 볼 수 있다. 당시 엘 그레코는 미켈란젤로는 그림을 그릴 줄 모르므로 자신에게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라는 에피소드가 전해질 정도로 후기 르네상스는 왜곡된 육체 묘사, 비현실적인 빛, 불균형, 과하게 강한 색채 등이 회와 안에 녹아 있다. 수많은 걸작과 거장을 탄생 시켰으며 많은 미술양식을 확립 시켰던 르네상스. 이 시대는 미술뿐만 아니라 인문학, 과학, 수학, 규칙과 미술의 합리성이 대두 되었던 시기이기도 했으며 해부학은 물론 많은 이론들이 저서로 나온 세계적인 전성기로 봐도 될 정도로 중요했던 시기다. 물론 마니에리즘이라는 자칫 네거티브로 보는 시각들도 존재하고 있으나, 후기 르네상스인 마니에리즘의 격정적이고 극적인 요소가 결합함으로써 더욱 완전해 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는 결국 미술사에서 가장 화려하고 탁월하다고 평가되는 바로크 미술을 자리매김 하는 데 바탕이 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며, 미술사에 있어서 진일보한 가장 중요한 시기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나하나 칼럼] 르네상스 미술 -①

나하나 인드라망 아트 컴퍼니 대표 다시 태어난다. 14세기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과거의 미술을 탈피하고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자. 는 의미의 <르네상스 운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예술가들은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과 문학, 인체와 자연에 대한 과학적인 탐구를 함으로써 자연의 형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들은 신화나 종교, 자연과 인간에 대한 것들을 주제로 삼았으며 새로운 기술의 도입과 해부학의 도움을 받아 초상화나 풍경화를 발달시키면서 새로운 장르를 개척 하였다. 사실 르네상스 시기는 기술적 혁신과 함께 창조적인 발견으로 인한 새로운 양식들도 등장한 시기다. 회반죽으로 된 벽 위에 그리는 프레스코 화, 나무판자 위에 그리는 템페라, 캔버스 위에 그리는 유화 역시 바로 이 시기의 산물이다. 그 중 유화의 발명은 아주 획기적이며 현대까지도 사용되고 있고, 풍부한 색채와 단계적 변화의 표현, 3차원적인 형태 및 질감의 표현은 미술을 크게 발전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 하였다. 또한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예술가의 지위도 상승하여, 르네상스의 전성기인 15세기 초반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세계적인 거장이 탄생하였다. 그 중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대표작으로 유명한 모나리자는 현재 소장하고 있는 파리 루브르 뮤지엄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나폴레옹의 침실을 장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원근법을 사용했으며, 회화에서 기하학적인 구성을 인식하여 삼각형 구도를 활용했다. 또한 이 작품은 최초로 액자에 넣어 벽에 걸 목표를 가진 것으로서 유화의 가능성을 열어준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르네상스 최초로 원근법이 사용된 모나리자 외에도 마사초라는 화가가 종교세라는 그림에서 원근법을 사용했으며, 인체를 기둥과 같이 묘사한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진짜 인간과 같이 원근법을 사용함과 동시에 3차원적으로 묘사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회화에서 원근법과 명암, 3차원적 피라미드 구도를 이루었다면, 도나텔로는 이것들을 조각에서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14세기 라파엘로는 고딕 조각양식을 극복하고 르네상스 조각양식을 확립하였다. 그는 다윗상이라는 최초의 실물 크기의 누드를 환조로 제작하였는데, 콘트라포스토를 이용하여 신체의 굴곡을 자연스럽고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반대로 보티첼리는 그리스 로마시대의 부활을 상징하는 비너스의 탄생이라는 작품을 통해 부활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르네상스 정신을 보여 주었으며, 베네치아 미술계의 제왕으로 불리는 티치아노는 금속이나 비단 등의 재료를 통해 사람을 마치 실물처럼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또한 헝겊으로 만든 캔버스 위에 유화를 그린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르네상스 운동은 건축에서도 일어났다. 조화로운 균형을 중심으로 고대 로마의 화려함과 웅장함이 부활했으며, 근대 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브루넬리스키 역시 수학적인 원근법을 발견하여 중앙을 중심으로 설계한 교회의 양식을 확립하였다. 그가 건축한 대표적인 건축물인 피렌체 대성당은 비례와 균형을 중요시 하는 르네상스 시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 작은 주택과 궁전을 설계한 팔라디오는 건축에 대한 네 권의 책을 저서로 남겼는데, 근대까지의 수많은 건축가들이 팔라디오의 지침서를 바탕으로 설계를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고전 유물에서 영감을 얻어 시작하여, 수많은 회화나 건축 양식들을 만들어 냈으며, 현대 미술의 바탕이 됨과 동시에 당시의 작품들은 지금도 전 세계 예술의 기본 지침이 되고 있다.

[나하나 칼럼] 중세 로마네스크 미술과 고딕 미술

나하나 인드라망 아트 컴퍼니 대표 중세 시대에는 건축과 조각이 발달하였으며, 그 대표적인 양식은 로마네스크 미술과 고딕 미술이다. 로마네스크라는 용어는 19세기 건축에서 주로 사용된 말로 로마와 같은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유럽의 건물들에서 볼 수 있는 두꺼운 벽과 아치가 로마의 석조 건축을 닮았다고 하여 유래된 용어다. 로마네스크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은 궁륭이라는 둥근 지붕이다. 궁륭은 버팀기둥과 아치를 바탕으로 설치되었으며, 단순한 상인방보다 적게 들어가는 재료는 교외 내부에 가능한 장애물이 적게 지어야 하는 기독교 건축인들 에게 커다란 이점을 가져다주었다. 또한 기존의 목조 지붕으로 지어졌던 교회들은 과거 화재에 의해 무너진 적이 많아 내화성이 강한 석조는 당시 건축에 있어 큰 장점이었다. 성당의 외부에는 단순하고 소박한 부조가 제작 되었으며, 정문의 윗부분에 위치한 반원형 모양의 팀파눔에서는 천국이나 지옥을 묘사하거나, 기독교적 논리에 따라 요괴들이나 최후의 심판의 장면 등을 석조판에 새겨 넣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문맹인 점을 감안하여, 기독교적 교리를 조각을 통해 전파했음을 의미한다. 또, 15세기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 고전문학을 기록한 유일한 형태의 책인 수사본이 기록 되었는데, 이는 우피루스나 양피지의 한쪽을 묶어 제작 되었다. 수사본이란 신의 말씀을 새긴 것으로 다른 의미에서는 삽화예술을 발전과 서구 문명을 잇는 중요한 수단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고딕예술은 높이를 자랑하는 예술이라고 할 정도로 하늘 높이 솟아있는 수직적 특징을 자랑한다. 고딕 건축은 교차 궁륭이 이어지는 부분을 덮어주는 늑골 궁륭과 외부에서 벽을 받쳐주는 석조다리인 부연부벽을 발명한 덕분에 세계 최고의 높이를 자랑하는 대성당들을 건축하였다. 또한 당시의 교회는 단지 예배를 보는 방이 아닌 구원의 길에 대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교회의 내부는 장식적인 요소가 강한 타피스트리, 스테인드글라스, 조각 등으로 꾸며졌다. 성당의 외부 벽에는 로마네스크와 마찬가지로 성경의 내용들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로마네스크의 선정적이고 강한 조각들과는 달리, 침착하고 인자한 느낌이 드는 조각들로 완성되었다. 또한 로마네스크의 부조 조각과는 달리 인물상들을 좀 더 사실적으로 묘사했으며, 환조에 가깝게 강하게 돌출되어 있는 형태를 지녔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은 성당을 더욱 신비한 느낌이 들게 하였으며 성당 내부에 영롱한 빛이 들어오게 함으로써 마치 현실과는 다른 세계에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즉, 당시의 성당은 시민들에게 단순히 예배를 보는 공간이 아닌 믿음과 긍지를 높이는 공간이었으며, 이를 건립하는데 있어 시민들이 참여해 그들의 높은 긍지의 상징의 표현으로 높이를 높이기 위해 애쓴 것이다. 또 이탈리아에서는 교회당의 벽이 프레스코 벽화, 벽면 모자이크, 패널화 등이 발전하였다. 이는 비잔틴 미술이 당시 유행하던 고딕양식과 어우러지면서 새로운 양식이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인물 하나하나를 표현했던 부분이 상황을 암시할 수 있는 미술의 형태로 전향되었다. 덧붙여 현실적인 부분의 표현이나 궁정 이야기 혹은 특권층의 세계를 보여주는 미술의 형태로 계승되었다. 이처럼 기독교 성경이나 신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중세 말기의 미술은 로마네스크 미술이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고딕 미술과 통합되어 국제적 고딕 미술 이라는 새로운 양식이 출현하였으며, 곧 유럽 전역을 사로잡고 미술사에서 큰 자리를 차지한 부분은 르네상스 미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점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나하나 칼럼] 아메리카 미술과 아프리카 미술

나하나 인드라망 아트 컴퍼니 대표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전에, 다시 말해 유럽 문명이 아메리카 대륙에 영향을 주기 전 고대 아메리카에서는 기원전 2천여 년 전부터 1만 년 전으로 유추되는 화살촉과 도자기들이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원시시대의 문화가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의 남서부 지역의 아메리카 원주민 나바호 부족은 염료와 풀잎 등으로 염색한 양탄자를 사용했던 것으로 유추되며, 부족의 주술사가 있어 질병을 치료하고 다산을 기원하였다. 오늘 날 나바호의 모래 그림 의식은 당시 원주민들이 모래위에 그림을 그려 사냥의 성공을 기원했던 의식이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미국의 애리조나 주의 인디언인 호피족은 목화 뿌리로 만든 채색된 인형인 카치나로 유명하다. 벤쿠버 섬 일대에서도 나무로 조각한 가면과 유골기둥 등의 예술품이 발견됨으로써, 당시의 토템을 알 수 있다. 아프리카 미술은 아메리카 미술보다 강력하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독창성을 갖고 있었으며, 주로 3차원의 조각품이나 가면 등이 발견 되었다. 그들은 조각상에 초자연적인 힘이 깃들여 있다고 믿었으며, 바로 이 신성한 조각상과 가면들이 그들에게 오는 재앙을 막고 축복을 준다고 믿었다. 사실 그들의 예술 작품은 사실적인 방식을 벗어난 원통형의 긴 몸통과 긴 얼굴을 만들었으며 규칙성이 없는 수직의 형태로 존재 하였다. 또한 가면은 주로 제례의식 때 의상과 더불어 사용한 듯 보인다. 물론 가면이 제작된 의도 역시 그들에게 초자연적인 일이 닥쳤을 때, 사람의 얼굴을 숨기기 위해 사실과 다르게 묘사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원시미술은 원시 시대부터 세계 곳곳에 존재하였다. 물론 현대미술의 중심인 서양 미술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 또한 원시 미술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피카소를 들 수 있는데, 피카소의 큐비즘은 바로 아프리카 미술의 영향을 받아 완성된 것이다. 피카소가 아프리카 미술을 처음 봤을 때, 피카소는 큰 영감을 받았고, 피카소의 미술의 방향성은 바뀌기 시작했다. 피카소의 작품 중 미국 MOMA에 있는 아비뇽의 처녀들이란 작품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데, 심지어는 당시 피카소가 아프리카 가면을 보고 화실로 돌아가 얼굴을 다시 그렸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또한 야수파 화가로 유명한 마티스, 드랭, 블라맹크는 아프리카 가면 수집에 열광적인 작가들이었다고 한다. 이들의 작업에 큰 영향을 미친 것 또한 아프리카 가면이었으며, 다른 초현실주의 화가들 역시 아프리카 미술에서 영감을 받은 화가들이 대다수 존대한다. 이와 같이 아프리카 미술은 전 세계의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이는 현대 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화가로써 인정받고 있는 하정우의 추상, 입체주의 작품을 보면 바로 아프리카 미술이 연상되는 것이 사실이며, 이 외에도 모더니즘과 추상 표현주의를 추구하는 현대의 많은 예술가들이 그것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처럼 원시미술은 단순히 문명이 발달되지 못한 시대의 미술로 인지할 것이 아니다. 이들은 단순한 목조각이나 그림을 넘어 그 이상의 큰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오늘날의 현대미술이 존재하게 된 가장 큰 근원 역시 원시미술이라 단정해도 좋을 것이다.

[나하나 칼럼] 로마예술

나하나 인드라망 아트 컴퍼니 대표 로마미술과 그리스 예술은 바늘과 실이다. 고대 로마는 그리스를 정복하였다. 하지만 문화, 예술에 있어서는 그리스의 예술품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다. 기원전 6세기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그리스의 예술품을 전리품으로 대량 유입하였다. 평소 그리스의 예술품을 동경하던 로마인들은 이를 수집하였고, 비싼 가격과 품귀 현상으로 이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그리스의 예술가들에게 예술품의 복제를 주문하였다. 로마의 예술은 그리스 고전주의와 헬레니즘의 양식으로 확립되었다. 하지만 초기 로마예술이 그리스의 작품을 복제한 탓에 그리스 예술품과 거의 흡사했다. 마론의 '원반 던지는 사람이란 조각품은 원래 그리스에서 제작되었다. 하지만 로마에서 대리석으로 이를 복제 하여 거의 같은 작품이 두 개가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제작된 로마의 대리석 조각품의 대부분은 그리스 조각의 복제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로마는 그리스 예술을 따랐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로마의 조각 작품은 그리스의 조각에 사실성을 가미하여 완성 되었다. 또한 헬레니즘 예술이 미묘한 인물의 심리에 대한 표현을 중점으로 제작 되었다면 로마 예술은 개성적 표현에 중심을 준 예술품으로 제작되어 얼굴의 주름이나 인상까지도 모두 표현된 베리즘을 통한 추상조각도 발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각들은 주로 로마 황제의 초상 조각에 많이 사용되었다. 실제로 아우구스티누스 황제의 베리즘 초상조각은 법원이나 공화당 등에 세워 놓음으로써 마치 황제가 있는 듯 연출을 하였다고 한다. 건축도 변화하였다. 로마의 건축은 크게 공공건축, 주거건축, 종교건축과 기념건축으로 나뉘다. 그 중 공공건축은 포룸, 대욕장, 콜로세움 등이 속하고, 주거건축은 도무스, 인술라, 빌라 등이 있으며, 종교건축은 판테온 신전과 훗날 중세 교회의 모체가 된 바실리카 양식으로 드러나고, 기념비와 개선문을 통해 기념건축을 볼 수 있다. 이 중 판테온 신전의 경우, 그리스의 3대 건축 양식인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식 양식을 모두 갖고 있는 건축 양식이며 이에 콤퍼지트, 토스카나식을 덧붙여 로마건축을 완성하였다. 이러한 로마의 건축 양식은 우리에게 로마 건축의 특징인 다양성을 시사한다. 또한 부조 역시 살아있는 조각을 붙인 듯 입체적으로 튀어나온 환조로 표현함으로써 로마의 예술가들이 사실적 묘사에 큰 중점을 두고 최대한 깊이 있는 표현을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고스란히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로마의 건축 양식은 후대의 건축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현대 건축에서도 사용되는 아치와 궁륭은 외관미를 중요시 했던 그리스 건축에서 실용성과 거주성을 고려한 현실적인 건축 양식으로 변화하여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회화에 있어서도 건축물의 실내장식인 벽화와 모자이크가 바로 이 시기에 등장한다. 이 시기의 모자이크는 자연석에 진흙을 데어 벽에 붙인 기법을 말한다. 따라서 이렇게 제작된 모자이크는 건축물 벽 곳곳에서 발견되고, 오늘날에도 교회등의 건축물을 지을 때 들어간다. 이처럼 로마예술은 여러모로 큰 발전을 해 왔으며, 사실적이고 실용적인 예술로써 현대까지도 큰 영향을 주었다.

[희로애락 비트코인-③] 성공한 자, 실패한 자, 그리고 이용한 자

[아시아타임즈=김태훈 기자] 비트코인 투자로 가장 유명해진 이로 10대 청년 에릭 핀만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12세에 불과하던 그는 할머니로부터 1000달러(한화 약 113만원)의 깜짝 선물을 받았다. 동년배 친구들이라면 스마트폰이나 게임기를 살 법하지만 핀만은 비트코인에 투자했다. 당시 비트코인 가격은 10달러에 불과했는데 몇 년 뒤 가격이 1100달러로 오르면서 핀만은 15세라는 어린 나이에 10만 달러(약 1억1370만원)라는 거금을 손에 쥐게 된다. 그의 스토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온라인 교육 프로그램 ‘보탱글’을 창업했는데 사업이 탄탄대로를 걸으면서 투자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지난 2015년 ‘보탱글’ 매입 의사를 밝힌 투자자들이 10만 달러 혹은 비트코인 300개를 제시했고, 핀만은 다시 한 번 비트코인을 선택했다. 당시 비트코인 가격은 200달러였는데 이것이 6500달러로 급등하면서 핀만은 10대 백만장자 자리에 오른다. 지난해 기준 그의 순자산은 450만 달러(약 51억1650만원)로 평가됐다. 제레미 가드너도 비트코인 투자자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미국 매체 비즈니스인사이더에 따르면 지난 2013년 친구의 권유로 비트코인 투자를 시작한 그는 중간 매개자를 거치지 않은 채 거래가 이뤄지는 가상화폐 기술에 매료됐고, 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고 커뮤니티까지 만들었다. 그가 지난 2013년 창업한 시장예측플랫폼 ‘어거’는 2015년 크라우드 펀딩에서 530만 달러(약 60억2610만원)에 달하는 자금을 유치했다. 또한 그는 지난 2014년 ‘블록체인 교육 네트워크’를 설립해 관련 교육을 제공했다. 가드너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가상화폐라는 영역에 머물지 않고 남성 화장품 브랜드를 창업한 것이다. 그는 지난 2019년 ‘메이드 맨’이라는 이름의 스킨케어 브랜드를 창업해 지금까지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물론 모두가 성공한 것은 아니다. 영국 더가디언에 따르면 영국 런던에서 광고회사를 운영하던 피터 매코맥은 지난 2017년 1월 비트코인 가격이 600달러 수준인 당시 5000파운드(약 793만원)를 투자했다. 비트코인 가격은 급등하기 시작했고 연말 2만 달러에 근접하자 그의 자산도 120만 달러(약 13억6440만원)로 불어났다. 이렇게 갑자기 자산이 불어나자 그는 그동안 꿈꿨던 것들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역 내 축구팀 하나를 매입해야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이를 실현하려면 500만 파운드(약 79억3285만원)가 필요할 것이라는 예상에 6개월 정도 더 기다리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가며 기쁨도 함께 사라졌다. 2018년 1월 말 비트코인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버텼는데 연말에는 4000달러 수준으로까지 떨어진 것이다. 장이 좋을 때 더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빠져나와야 했지만 더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이 화를 낳은 것이다. 비트코인에 직접 손대지 않고 돈을 버는 사람들도 등장했다. 자신의 유명세를 활용해 돈을 받고 가상화폐를 홍보해주는 것이다. 호주 매체 뉴스닷컴 등에 따르면 호주의 틱톡,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인 ‘아티스 폴’은 ‘허쉬코인’이라는 이름의 신규 가상화폐가 출시됐다며, 매달 약 50달러(약 5만원)를 주고 구독서비스에 가입하면 가상화폐 관련 소식을 제공하겠다고 홍보했다. 최근 미국의 유명 연예인 킴 카다시안 웨스트를 비롯한 일부 연예인들은 일정한 광고료를 받고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알트코인(후발 암호화폐)인 ‘이더리움맥스’ 홍보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이들이 관련 영상을 올리면서 제공되는 정보는 단순한 일반 정보이거나 개인의 의견일 뿐 재무적인 조언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투자자들에게 재무적 상담을 도와줄 전문지식이 없는 인플루언서가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한다. 특히 나이가 어릴수록 이들 인플루언서에게 큰 영향을 받으므로 단순히 이것이 재무적인 조언이 아니라고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투자자들이 잠재적으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것은 물론 만약 피해 사례가 속출할 경우 금융당국이 가상화폐 관련업체들에 대한 규제를 꺼내들 수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 경제매체 CNBC에 따르면 핀테크 관련매체 핀의 제임스 레드베터 에디터는 “여타 상품과 서비스처럼 가상화폐나 거래소도 인플루언서를 활용해 자신을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다”며 “다만 인플루언서가 돈을 받고 홍보한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는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수입 픽업 개척자 '콜로라도'에 무슨 일?…포드 '레인저'에 '완패'

[아시아타임즈=천원기 기자] 수입 픽업 시장의 개척자 한국지엠 쉐보레 '콜로라도'가 올해 부진의 늪에 빠진 것으로 나타났다. 23일 자동차업계에 따르면 쉐보레 콜로라도는 올해 5월까지 누적 판매량이 전년보다 48.1% 급감하는 등 1208대에 그쳤다. 콜로라도는 지엠으로부터 수입·판매하는 픽업트럭으로 지난해 국내에 본격 판매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올해는 '차량용 반도체' 수급 문제로 판매 부진에 시달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2019년 8월 공식 출시된 콜로라도는 1289대를 시작으로 지난해 5049대가 판매됐다. 콜로라도와 함께 쉐보레가 수입·판매하는 대형 SUV '트래버스'도 같은 기간 14% 감소한 1431대에 머물렀다. 콜로라도의 경우 지난달 판매량은 더욱 뼈아프다. 확대되는 수입 픽업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포드코리아가 선보인 '레인저' 시리즈에 완패를 당했다. 지난달 판매량은 콜로라도 64대, 와일드트랙과 랩터 등 뉴 레인저는 총 125대가 판매됐다. 2월부터 판매되기 시작한 레인저는 349대의 누적 판매량을 기록했다. 한국지엠은 콜로라도의 경우 상품성에 자신이 있는 만큼 판매 실적은 조만간 회복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실제 한국지엠은 이달 주요 차종에 대해 최대 250만원까지 할인을 지원하고 있지만 콜로라도는 '정가판매'를 고수한다. 마케팅도 강화하고 있다. 최근에는 콜로라도와 트래버스의 오프로드 성능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고객 체험 행사 '쉐비 다이나믹 익스피리언스'를 성공리에 마쳤다. tvN 예능 '바퀴 달린 집2'에도 지원하는 등 콜로라도의 상품성 알리기에 적극적이다. 특히 바퀴 달린 집2에서 콜로라도는 우수한 견인능력으로 시청자들의 눈도장을 확실히 찍었다. 콜로라도는 토우·홀 모드가 적용돼 대형 트레일러 하우스를 견인하거나 무거운 짐을 적재한 상태에서도 최적화된 변속패턴으로 보다 안정적이고 부드러운 주행이 가능하다. 스웨이 컨트롤 기능이 포함된 스테빌리트랙 차체 자세 제어 시스템은 고속주행 시 발생할 수 있는 트레일러의 스웨이 현상을방지해 주행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다. 기본적인 주행 실력도 수준급이란 평가다. 가솔린 3.6리터 V6엔진과 8단 자동변속기가 조합돼 최고출력 312마력 최대토크 38kg·m의 성능을 발휘하고, 전자식 오토트랙 액티브 4×4시스템은 빙판, 눈길 등 악조건에서도 최적의 접지력을 발휘한다.

‘백화점·마트·편의점·이커머스’…‘동행세일’ 총출동, 성과날까

[아시아타임즈=이경화 기자] 코로나19로 움츠러든 유통업계가 소비 진작에 팔을 걷었다. 백화점을 비롯한 대형마트, 편의점, 이커머스 업체 등이 참여하는 대규모 할인 행사인 대한민국 동행세일이 24일부터 다음달 11일까지 진행된다. 침체된 국내 소비 심리를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할지에 관심이 모아진다. 업계에 따르면 롯데백화점은 24일부터 다음달 11일까지 ‘힘내라 대한민국!’을 주제로 정기세일에 들어간다. 남녀패션·잡화·리빙 등 전 품목에 걸쳐 올 여름 신상·이월상품을 최대 50% 할인 판매한다. 주말에는 브랜드별로 구매액의 최대 10%를 상품권으로 돌려주는 프로모션도 연다. 스포츠의류 할인행사도 한다. 롯데백화점은 나이키 대표슈즈 와플원을 본점·잠실점 등에서 할인가에 선보인다. 아디다스는 인천터미널 행사장에서 24~29일 여름 이월상품을 최대 50% 할인한다. 다음달 2~11일에는 랑콤·입생로랑·설화수 등 20개 유명 화장품 브랜드가 참여하는 할인전도 연다. 신세계백화점 또한 24일부터 다음달 11일까지 여름 정기세일을 한다. 골프의류 잭니클라우스·블랙앤화이트·빈폴골프 등을 최대 20% 저렴하게 내놓고 수영복 브랜드 아레나·나이키스윔·엘르 등은 최대 30% 할인 혜택을 준다. 랄프로렌칠드런 등 44개 아동 패션브랜드 제품도 최대 30% 할인 판매한다. 신세계백화점은 재고소진에 어려움을 겪는 국내 중소 패션 기업 돕기에도 나선다. 25일부터 다음달 1일까지 ‘코리아 패션마켓 시즌3’을 열고 최대 50% 할인혜택을 준다. 참여브랜드는 지컷·스튜디오톰보이·더아이잗컬렉션·지오다노·데무·최연옥·캠브리지멤버스·올젠·보니스팍스 등 총 37개다. 현대백화점 역시 24일부터 다음달 11일까지 압구정본점 등 전국 16개 점포·현대프리미엄아울렛 김포점 등 17개 점포에서 여름 정기세일 겸 동행세일을 한다. 정부 주최 패션 할인전 ‘코리아 패션마켓 시즌3’을 통해 신촌점 등에서 50여개 브랜드 이월상품을 최대 60% 할인해준다. 압구정본점 등 전국 16개 점포에서 현금처럼 쓸 수 있는 플러스 포인트 쿠폰 30억 원어치도 푼다. 대형마트와 편의점, 온라인 유통 플랫폼도 동행세일에 함께한다. 롯데마트는 24일부터 30일까지 한우, 해산물 등을 최대 30% 할인해준다. 이마트는 24일부터 30일까지 일주일간 신선, 가공 등 먹거리 상품과 여름 가전 할인 행사를 준비했다. GS리테일은 24일부터 GS25, GS더프레시, GS프레시몰 등 온·오프라인에서 생필품 1+1, 2+1, 할인, 경품 증정 행사를 펼친다. 무엇보다 GS프레시몰에서는 전국 유명 맛집 상품을 최고 50% 할인가에 선보인다. 이마트24는 동행세일 첫날 24일 하루 동안 현대카드 결제 시 원두커피 이프레쏘 아메리카노를 100원에 판다. 이달 말까지 와인 20여종도 최대 46% 저렴하게 판매한다. 롯데온은 동행세일 기간 국내 대표 중소기업상품 1300여개를 최대 20% 저렴하게 선뵈는 기획전을 한다. SSG닷컴은 27일까지 매일 선착순 1만 명에 SSG페이로 5만 원 이상 구매 시 최대 3만원 할인 가능한 22% 쿠폰을 준다. 추첨을 통해 SSG 랜더스 경기입장권을 1인당 2매 주는 이벤트도 연다. 우수 중소기업 베스트 상품만을 선정, 최대 60% 할인하는 별도 기획전도 펼친다. 이와 함께 11번가는 25%·15% 할인쿠폰을 동행세일 기간 매일 발급한다. 티몬은 티비온 라이브커머스로 소상공인의 신규 판로 지원을 위한 특별 기획전(최대 40% 할인 쿠폰 제공·무료배송)을, 쿠팡은 이 기간 중소기업 통합 기획전·추천상품 기획전 등을, 위메프도 식품·패션·리빙·가전 등 다양한 카테고리의 소상공인 상품을 최대 40% 할인해준다. 대한민국 동행세일은 중소벤처기업부가 코로나19 장기화로 침체된 내수를 활성화하는 차원에서 지난해부터 열고 있는 대규모 할인행사다. 중기부에 의하면 지난해 동행세일 기간 주요 백화점 3사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4% 증가했다. 명품 매출이 50% 안팎 늘었고 가전 부문 매출도 구매액 환급·상품권 증정 등 행사에 힘입어 큰 폭 뛰었다.